부캐 : 동네작가
작은 스케치북, 휴대하기 좋게 만들어 놓은 물감, 붓, 물통을 작은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
미리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크루아상을 받아와, 테이블 한 쪽에 두고, 잠시 카페 창 밖을 내다본다.
이내 0.2mm짜리 얇은 펜을 들고, 눈 앞에 펼쳐진 지금 이 순간의 장면을 스케치북에 슥슥 그리기 시작한다.
선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구도가 안 맞고, 머릿 속으로 상상한 그림과는 다르지만 꿋꿋하게 펜을 움직인다.
이 졸작을 옆테이블에서 쳐다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3년 전 우연히 SNS에 올라온 '그림이 일상이 되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5주 완성 [드로잉프렌즈] 그림강좌를 발견하고, 주1회씩 5번만 '믿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리기를 시작했다. 사실, 그림을 그닥 잘 그리지 않았던 중학교 시절, 엄마를 졸라 방학 한달간 미술학원에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그 때부터 마음 속 어딘가에 계속 자리를 잡고 있었나보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퇴근을 하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는 하루 일과 때문이기도 했다. 일 때문에 주말에만 춘천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다 보니 평일은 고스란히 나 하나만 챙기며 보내고 있었고, 가족과 떨어져 매일을 보내는 일상이 처량하게 느껴질 때였다.
그냥 그리고 싶은 걸,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다 보면 내가 그린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내 그림이 남는 경험은 뭔가 다른 차원에 놓여진 느낌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물과 나의 붓끝까지만의 공간과 시간 이외에 모든 주변은OFF 상태가 된다.
그렇게 우연히 별거 아니게 시작된 그림 취미 생활 덕에 혼자 있는 시간에는 틈만 나면 이것 저것을 그려댔다.
주말이면, 그림도구를 작은 에코백에 챙겨 들고, 춘천 골목을 걸어다녔다. 골목 카페에서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골목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 속 풍경을 그렸다. 이렇게 그린 그림은 인스타그램에 나만의 갤러리에 그림을 걸 듯 하나 하나 올렸다.
어느날 춘천 육림고개를 걷다가 춘천일기 라는 춘천을 소재로 한 작은 상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를 발견하고는 이 로컬상점의 매력에 푹 빠졌다.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늘 춘천은 이래서 저래서 너무 좋아라고 떠드는 것보다 훨씬 간결하게 상품 속에 춘천을 담아 소개하고 있는 이 춘천일기 상점이 좋아서 몇 번 들러 작은 물건들을 구경했다.
내게는 신기한 보물상자 같았던 춘천일기를 담은 그림을 그려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고, 이렇게 춘천일기의 찐팬이 된 계기로 춘천일기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춘천 이곳 저곳의 소박한 그림 몇장이 춘천 엽서로 출시되면서 춘천일기1호동네작가라는 타이틀이 생겼다.
이제 노을집 2층에 그림공간을 마련하고, 내가 선곡한 음악의 볼륨을 마음껏 높여놓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지인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잊고 살아 온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에게 그림을 그려볼 것을 권하곤 한다. 그림을 그리며 만나는 또 다른 세상의 공기를 그들에게도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