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걔가 규칙을 어긴 거잖아."
캐나다 학교에서 잘 적응하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께 이메일이 왔다. 세모가 친구와 휴식 시간에 공놀이를 하다가 다투었다는 것이다.
"세모야, 오늘 그 친구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브리가 규칙을 자꾸 어겨. 내가 규칙대로 하라니까 싫다고 내 공을 자꾸 뺏어가려고 해서 내가 절대 안 주려고 했거든."
"그렇구나. 다른 친구들은 반응이 어땠어?"
"다 나한테만 뭐라 그래. 규칙은 지켜야 하는 게 맞잖아, 엄마. 그렇지?"
늘 친구가 좋다고 노래 부르는 ADHD 아이.
이 아이의 어려움은 친구 욕구는 큰데 사회성은 낮은 것이다. 사회성이 낮다는 말은 사실 아주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눈치가 없다든지, 공감을 못한다든지, 자기중심적이라든지... ADHD 아이가 약물치료를 하고 나면 이런 문제들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키우면 키울수록 가장 가르치기 어려웠던 부분이 사회성이란 것을 느낀다.
어릴 때는 세모가 규칙을 어길 때가 많았다. 낮은 작업 기억으로 잘 잊어버리고, 기다리는 게 어려워서 자기 순서를 지키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자꾸 자기 순서만 빨리 고집한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초등 저학년이 지나 초등학교 3학년 정도가 되니 '규칙'을 잘 지킬 수는 있지만, 바로 이것이 부족하단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구나 자아가 세진다. 그렇게 세지는 자아들이 만나 관계를 만들고, 친구가 되어간다. 이때 인기가 많은 사람은 절대 부러지지 않은 대나무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유들유들 관계에 맞춰 잘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세계도 그렇다. 부루마블에서 무인도에 두 번 연속 갇혀 있는 친구가 너무 재미가 없어 흥미를 잃지 않게 한 번은 눈감아주는 센스 같은 '융통성'을 발휘하는 친구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세모는 그런 융통성이 부족했다.
"규칙"을 지켜야 하는 거라고 열심히 가르쳤더니, 이젠 때에 따라 관계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함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ADHD와 사회성 기술들>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고 "이거다!" 했던 부분이 있었다.
ADHD 아이는 놀이의 목적을 모른다는 것
동네 축구를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은 '재미'가 목적이다.
ADHD 아이는 '이기는 것'이 목적일 수 있다.
ADHD 아이는 홀로 국가대표 경기를 뛰듯 남의 팀은 친구가 아닌 '적', 우리 팀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아주 큰 목적을 갖고 뛰고 있을 수도 있다.
세모 역시 그랬다.
지는 것에는 익숙해졌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연기다.
그 순간만큼은 '이겨야' 한다. 반드시.
그러니 '규칙'을 어기는 게 언감생심 가능한 일이겠는가.
"세모야, 아이들은 그 공놀이를 '왜' 할까? 이기고 싶어서 할 것 같아, 아니면 재밌게 놀고 싶어서 하는 것 같아?"
"재밌으려고?"
"세모는 친구들이 다 같이 재밌어서 다음에 또 공놀이를 하는 게 좋아, 아니면 "내가 말한 규칙대로 해!"라고 해서 친구들이 기분이 상해서 다음엔 세모랑 공놀이를 안 해도 괜찮아?"
"나는 다음에도 노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게 세모가 원하는 거지?"
"응. 난 다음에도 놀고 싶어."
"그럼 다음엔 좀 화가 나도 그냥 한 번쯤은 넘어가줄까? 아이들은 그곳에 이기려 모인 게 아니야. 때론 규칙보다 우정이 더 중요해. 그러려면 친구들도 즐기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내가 좀 옳더라도 친구들의 의견에 한 번쯤은 따라야 할 때도 있어. 그건 많이 어려운 일인데 자꾸 연습하면 점점 더 좋아져. 할 수 있겠어?"
"어렵지만, 그렇게 해볼게."
어쩌면 아이는 내가 그 놀이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이 순간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해도 내가 지금 우겨서 이기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융통성이 부족한 아이,
가벼운 놀이에서 자꾸 친구의 기분을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라면, 한번 질문을 해주자.
아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단 한 번의 놀이인지, 지속되는 놀이로 쌓이는 '우정'인지를.
조금은 굽힐 수 있는 '융통성'.
어른도 어려운데 쉬울 리 없다.
그저 연습뿐.
한번 하면, 두 번은 더 쉽겠지.
일단, 또 화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