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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Jun 30. 2021

나무와 균열, 수중의 위로 : 솔직함에 관한 고찰

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6월]


[답신答信]


안녕. ‘5월의 나’야. 


넌 이미 없겠지만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지. 너와 난 같은 사람이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만큼 조금씩 달라지는 게 인간이라는 필연적인 논리가(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법칙이) 다른 사람이게 했지. 음. 우선 내가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어쩌겠어. 다 너 때문이지. 5월 31일이 끝날 즈음에 나에게 많은 걸 기대한다고 적어놨더라. 넌 기억하기는 하니? 내가 기억하니까 너도 기억하는 걸까.


그때 네가 남긴 말을 가져오면 이래. “마음이 뛰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볼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볼까. 내 성격을 반대의 것이라 믿어볼까” 솔직히. 양심이 없다고 느껴졌어. 그때 넌 이들 중 하나를 시도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많은 걸 나열하다니. 그래도 조금은 확신이 없었는지 “6월의 제게 기대하는 바가 큰가 봅니다”라고 썼더라. 그래도 너무했어. 오죽하면 그때 불쑥 튀어나와 “그런 기대는 너무 버거운데”라고 말해야 했었겠냐고.


참 못난 편지다. 그치. 미안해. 시작부터 잔소리해서. 그래도 한 달 내내 참고 이번에 딱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니까 봐줘. 난 널 친한 친구처럼 대하고 있지만 사실 긴장도 좀 된단 말이야. 왜 긴장된다고 묻는다면, 그래서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네가 내게 그런 기대를 정말 진심을 담아 얘기했었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잠시 심호흡하고. 그러니까, 나 역시 그 기대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돌아보면 그렇잖아. 새롭게 시작하자고 했지만 결국 몇 달은 방황해야 했던 너에게 그런 간절함은 불가피한 것이었어. 난 그걸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퍽 죽어있었잖아. 그 몇 달은. 시작과 함께 두근거리고 싶다면서도 결국 그러지 못한 채, 그래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난 채로 말이야. 이따금 우울증을 겪었다면, 그 모든 이유는 ‘결국 아무 일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테고. 그저 막연하기만 하면 좋았을 텐데. 정말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걸, 그 몇 달 동안 눈앞에서 선명히 확인하는 것 같아서 실재하는 두려움과 한계를 마주한 것만 같았지.


그래서, 그나마 매달 끝자락에 무어라 남기기라도 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러지 않았으면 그 몇 달은 기억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으로만 기억됐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방금 전까지도 매달의 내가 이런 사적인 무엇인가를 글로 남기는 게 과연 얼마나 의미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돌아보면 그것 덕에 두근거리고 싶다는 바람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좋았어.


아직 너하고 편집자님만 아는 글에 그렇게 썼잖아. 네겐 글이 ‘애증’이고, 이런 사사로운 글들은 거기서 ‘증’을 조심스레 떼어낸 것이라고. 다른 사람 시선에도 걸맞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강박과 두려움을 떼어냈다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썼지. 그러곤 이렇게 말했어. 그러기에 내가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글들이라고. 내가 지금 쓰는 편지도 그럴 테지. 우선은 네게 충분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게 여기서 그리는 첫 번째 소원이야. 


이런. 한 달 만에 만나니 할 말이 많았나 봐. 무슨 수다 떨듯이. 나름 편진데.


사실 한 달 내내 잊고 있었어. 네가 내게 건 기대가 있다는 것도, 그 기대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도. 그걸 달성해야 하는 목적으로 삼고 싶지 않기도 했어. 넌 억지로 하는 게 잘 안되는 사람이잖아. 간절할수록 괴로워하는 사람이잖아. 그런 순간들에 대한 상처가 아직 남아있어서 자연스럽게 그저 흘러가고 싶다는 마음이 크기도 했어. 모르겠어. 우리가 삶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이 그렇게 된 걸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되, 바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꾸준히 기록하자고. 뭐랄까. 우리는 꼭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먼지를 붙잡아서 겨우 만든 화살표로 이번에는 어디를 보며 가볼까 조심스레 고민하는 사람들인 것 같아. 손끝으로 먼지가 내려앉은 바닥을 삭- 삭- 긁으며 우리의 방향을 조심스레 건드리는 사람들. 


음. 사실 나도 조금 신기해. 네가 전해준 기대들을 어떤 면에선 모두 해냈거든. 지금도 하고 있고. 무엇보다 조금 더 용기가 생겼고, 여유가 생겼어. 어때. 기대보다 더 좋은 결과지 않아? 자. 한 번 웃으라고. 씨익 미소 지어 보이란 말이야. 했어? 그럼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게.


우선 새로운 일을 시작했어. 물론 아주 거창하게 “새로운 일!”이런 건 아니고. 친구 하나랑 손잡고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실천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그룹을 만들었어.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말하기 위해 너는 조금 더 막연한 백지 앞을 머물며 고민했고. 그러다 보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물꼬를 조금씩 트기 시작했고. 이어서 우연히 시작한 것들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 시작했어. 심장이 쿵쾅쿵쾅 뛸 정도의 두근거림은 아니지만, 적어도 매일 움직여야 할 가장 솔직한 이유가 될 잔잔한 두근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 같아.


그리고 아주 새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몇 년 만에 친구 같은 동생을 직접 만났지. 만나기 전날까지도 나는 내가 나이가 더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번처럼 말을 잘 못해 분위기를 망치진 않을까, 나 때문에 괜히 어색해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걱정하고 있었어. 참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만큼 지난 일들의 상처와 두려움이 컸던 탓일 거야. 무엇보다 여전히, 너와 난 밤새 그런 꿈을 꾸곤 하니까. 하지만 그날은 정말 즐거운 날이었어. 또 만나자고 약속을 해야 했을 만큼. 그 약속을 하는 게 거리낌 없었을 만큼.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는 흔치 않은 생각을 떠올릴 만큼. 정말 소중했어.


생각해보니 네가 3월부터 바쁘게 참여했던 활동을 함께한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도 가졌구나. 야, 근데 이 나이 되니까 내가 항상 언니더라. 물론 내가 나이를 그리 많이 먹은 것도 아니지만, 많은 만남들이 슬슬 그런 상황이 되더라고. 그러다 보니 사뭇, 언니다운 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동료다운 동료. 그만큼 나의 것을 돌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이랄까. 이 역시 조바심 낸다고, 억지로 한다고 될 일이 아니겠지? 어쩌면 너와 난, 반년 내내 자연스레 마음을 먹으며 흘러가는 방법을 조금은 더 확실하게 터득한 듯해. 그래서 작은 것부터 스며들어보려고. 언니다운 언니. 나다운 나. 그런 건 그런 방식으로 이루고 싶어. 


내 성격을 반대의 것이라 믿어보는 건. 글쎄다. 근데 사람에게 답변 하나 보낼 때마다 사소한 실수 하나로도 지구가 반으로 쪼개질 것 마냥 두려워했었는데 조금은 여유가 생긴 것 같아. 물론, 아직도 온갖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 익숙하지만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이제는 나를 더 다독이려 해. 그런 다행스러운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걸로 결론지어봐도 괜찮을까? 사소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에겐 그만큼 변했다는 걸 기억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그치?


나는. 음. 만족스러워. 너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도 1년의 딱 절반이란 시간  끝자락에서 이렇게나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기쁘다고 말이야. 그리고 욕심낸다면, 곧 ‘지난 것’이 될 우리의 반년이 그리 허무하지는 않았다고 다독이고 싶어. 네가 무기력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꼬박꼬박 그 순간을 기록하며 쌓아온 간절함과 반복되던 소원들이 내가 이런 6월을 살게 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너무 막연했다는 걸 기억해. 그리고 사실 지금도 막연해.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두렵지 않아. 내가 잡고 싶은 것이 작게나마 생겼다는 그 사소한 변화가 그런 막연한 시간을 살게 한다는 걸 이번에 경험한 걸까. 모르겠어. 근데 알겠어. 지금이 그렇고,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까.


네가 살던 시간을 자책하지 말아줘. 아마 이 회신을 받고 나서 모진 말을 조금 더 거둘 거라고 믿어. 알겠지? 그래, 이제 마무리해야지.


너는 잘 지냈어 그 시간을. 우리 언젠가 또 보겠지. 그때 만나자.

그럼 안녕.





[나무와 균열, 수중의 위로 : 솔직함에 관한 고찰]


사람은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솔직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를 솔직하다 부르는 걸까. 순수한 솔직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악한 솔직함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을까. 솔직함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솔직함은 약속으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와 내가 어느새 마음 같은 것으로 하고 만, 서로를 헤아리기 위해 맺은 약속.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다”라고 언제 진심을 전할지, 그리고 그 진심을 어떤 표현으로 기꺼이 받아들일지에 대한 약속. 그런 솔직함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내가 아무리 솔직히 말해도 그가 거짓말이라 하면 그 역시 그가 나를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테니.


그 이전에 내가 내게 묻는 솔직함이 있다. 나는 내게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가 허허벌판 같은 내면 어딘가에 나무 한 그루로 우뚝 서있다. 그것은 외롭다. 그리고 그 끝은 쉬이 헤아릴 수 없기에 꼭대기까지 잔뜩 닿으려는 일은 어떻게든 괴롭다. 그러나 누군가의 앞에선 가장 높게 뻗은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올라서 기꺼이 허공을 손바닥에 맞이하고 싶은 반면 다른 누군가의 앞에선 앉아있는 시선의 높이를 유지하는 것마저 쉬이 해낼 수가 없다. 솔직함이란 건, 그런 것이다. 


그 나무는 솟아있기만 하지 않다. 땅 깊이 뻗어있기도 하다. 뿌리는 퍽 복잡하다. 그 날카로운 속내는 아무도 볼 수 없다. 나조차도 볼 수 없다. 다만 잦은 지진이 일 때마다 쿡쿡 쑤시는 통증으로,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생경함을 느끼는 것으로 겨우 인식될 뿐이다. 내가 나에게 묻는 솔직함은 사실 그토록 모호하다.


나는 내가 그나마 글을 쓸 때 솔직해진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나름 가지런히 정리한 문장으로 다시 포장하는 애매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가장 뭉툭한 것이 가장 날카로운 것이 되곤 한다. 그런 거듭되는 모순으로 솔직함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인지 깨닫곤 한다. 몸 어딘가에 잘못 박힌 얇은 가시처럼 이따금 거슬리는 따가움으로 솔직함이란 걸 미약하게 고민할 뿐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솔직하구나”라며 진심으로 읊게 되는 글들이 있다. 나의 유월은 그러한 것을 읽었다.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를 모은 <명랑한 은둔자>은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탄식하게 했다. 단단히 박혀있던 나무가 잠시 들썩이는 경험이었다. 지면에 약간 금이 간 사건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작가와 나는 영혼을 나눈 사이일지도 몰라. 우리 같은 존재였을지도 몰라” 대뜸 일방적으로 영혼을 나눴다며, 같은 존재였다며 고백하는 건 꽤 이기적인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내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언어가 그러한 것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영혼’이란 단어, 그 누구에게도 건넬 수 없던 ‘같은 존재’라는 표현. 도통 입에 담기지가 않아서 지면 아래 침잠하게 두었던 말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내게 일어난 균열은 그 정도의 것이었다. 


균열. 있어서는 안 될 부정적인 단어로 보인다. 또한 그건 분명 아픈 일이다. 다만 그런 통증은 애써 감춰온 것을 비로소 마주하게 한다. 어째선지 내게는 <우리가 사는 방식>에서 저자시그리드 누네즈가 그려낸 수전 손택의 삶이 그랬다. 읽으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대범하고, 충돌하고, 아프고, 기쁜 건 수전 손택인데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서성이는 건 내 마음이었다. 그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라 단언하면서도, 그를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그의 삶을 배우고 싶은 동시에 어색함이 일었다. 존경스러운 동시에 직접 대면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왜 그랬을까. 내 마음은 왜 그리 모순적이었을까. 그만큼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일 없이 그 사람 자체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거리낌 없이 쓰인 글이었다. 나는 그 글과, 그 글을 읽은 내 경험을 회상하며 이 도서는 예리하고 솔직한 글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들과 직접 마주한 적은 없다. 그러기에 특정한 관계를 지님으로써 할 수 있는 약속 같은 건 없었다. 단지 그 문장들을 마주한 내가 마음을 다해 내뱉은 ‘솔직함’이란 언어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남긴 것 앞에서 균열이 나고 흔들렸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그런 느낌이었다. 해명할 필요 없는 솔직함은 위로가 된다고. 잠시 깊이 잠겨 펑펑 울어도 괜찮은 두툼한 이불 무더기 아래 같은 것이라고. 무심코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도 왠지 나를 증명하게 하는 다정한 거울이 되어주는 것 같다고. 그들의 글이 그랬고, 나도 그런 글을 꿈꾸고 싶어졌다. 불현듯 터져 나온 꿈이었다. 


고독 사이에서 비로소 꿀 수 있는 것이었다. 진심인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잠시 넘쳐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주 몇 날. 사실 기껏해야 몇 안 되는 찰나에, 지면을 뚫고 아주 깊이 박혀있던 솔직함의 척도 한 그루는 잠시 깊은 수중을 헤매야 했다. 들어찬 허공은 냉정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았다. 수압은 호흡을 조금 벅차게 했지만, 그만한 저항마저 포근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것이었다. 바싹 마른 황무지도 나쁘지 않지만, 축축이 젖어 질척이며 발걸음을 붙드는 진흙탕도 좋았다. 벌어진 틈으로는 단비가 쏟아져 내렸고, 헛헛한 공기 하나 못 마셨던 내가 내게 묻는 솔직함은 잠시 벅찬 물기를 기꺼이 머금었다. 솔직함의 위로란 건, 그런 것이었다. 



[“좋아하는 ‘나’를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이 문장을 쓰며 2021년을 꿈꿨다. 그리고 어느새 중간 지점에 도달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이 문장을 이야기하려는 글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저 나를 기록하는 것이라 표현할 만한 행위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남기는 기록의 이름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이었을 뿐이다. 그저 나란 사람의 이름이 일단은 ‘예찬’이라 주어진 마냥.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문장의 의미를 고민하기는커녕, 그런 한 달을 보내온 내가 그 순간에 남겨야 했던 글들이 매번 더 앞서나갔다. 


참 나다웠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것이 “좋아하는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알게 모르게 나는 ‘일’이전에 ‘나’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는 걸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이다. ‘일’이라 불릴 만한 것은 잡지도 못하고, 나를 향해 “대체, 왜 그래?”라며 계속 질문해야 했던 지난 3월, 4월, 그리고 5월이 그를 증명한다. 그런 시간을 살고 나서야 나는 겨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향해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러기에 매달 남겼던 나의 이야기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문장과 퍽 잘 어울리는 기록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가장 무기력한 시간이 가장 선명하다. 3월, 4월, 5월. 나는 이들을 끝내 품에 끌어안을 수 있는 6월을 살았던 것 같다. 팔에 힘이 실리고, 가슴팍에 지그시 눌리는 감각으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아린 압박을 느끼고 또 느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기는커녕, 무감각한 권태기 속에서 몸부림쳤던 시간들을 이제서야.


다른 시간도 회상하자면. 1월은 아마 막연했다. 문장에 있는 단어들에 대한 가벼운 상념들을 자유롭게 담았었다. 처음은 늘 서툴기 마련이니 오글거린다기보다는, 그냥 귀엽게 봐주고 싶다. 2월은 불안했다. 한편으론 정말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글 몇 개를 남긴 걸 보면, 그때까지도 나름 고만고만하게 지냈던 것 같기도 하고. 3월은 바빴고, 조금씩 불안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안한 느낌과 함께 4월, 5월을 살았다. 휘적휘적 무기력하게 그저 할 일만 하며 지내보기도 하고, 아직도 이런 내가 너무 불안해서 마음껏 떨어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6월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라 이해해도 괜찮을까?


지난 시간의 나를 이렇게 기억하는 건 평생 처음인 것 같다. 크고 작은 사건으로 어렴풋이 그 달을 살았다는 걸 떠올릴 수는 있었지만, 그런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사건이 아닌 그저 내가 살아간 감정과 심정으로 지난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건 처음이다. 


*


문장에서 ‘일’을 ‘나’로 바꾸어도 위화감이 없다지만, 아직 나는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좋아하는 ‘나’를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긴 문장은 그 자체로 내가 완주하고 싶은 과정이다. ‘좋아하는 ‘나’”를 헤아리기 위해 반년이란 시간을 걸었는데 아직 ‘좋아하는’이란 수식어도 완주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느리게나마 걷고 있고, 적어도 내 시선은 그것을 향해 있다.


남은 반 년 동안 좋아하는 나를 헤아리고, 좋아하는 일을 마주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에 도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몇 걸음을 더 걸어야 할까. 걸음의 보폭은 매달, 매주, 매일, 매시간 얼마나의 폭과 리듬으로 뻗어갈까. 아님, 전혀 다른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은 시간과, 여전히 내 곁에 남은 문장들과 함께 이제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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