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발치에는 추락한 온갖 모양의 물들이 겹겹이 쌓여 얼어가고 있었다.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2-
거짓말의 잔해 속에 피어난 오르골
나는 거짓말이다. 밀가루 반죽처럼 잔뜩 뭉개진 가면. 두려움을 맞은 탓에 못난 가면에는 촛농처럼 녹아내린 흔적이 가득했다. 촛농이 떠밀려 내려가고 남은 자리엔 해면처럼 구멍이 듬성듬성 뚫렸다. 오른쪽에 난 꽤 커다란 구멍 너머로는 망설임을 헐겁게 곱씹는 입술과 허연 이가 꿈틀거렸다.
눈가에는 눈곱이 잔뜩 끼었다. 성에다. 맑은 봄을 노래하려던 낯은 봄에 얼어버린 얼음조각을 노래하고 있었다. 꽃들은 말라가고 풀은 누래지고 땅은 차갑게 굳어간다. 모든 새싹들이 땅 아래에 갇힌다. 나의 ‘낯’은 온갖 ‘애哀’를 다 품은 표정으로 얼어버렸다. 가끔 힘을 내서 아- 하며 움직여보는 턱뼈에서는 빙하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후드드둑 - 가면 뒤에 숨은 눈썹 아래엔 고드름이 추락했다. 그의 발치에는 추락한 온갖 모양의 물들이 겹겹이 쌓여 얼어가고 있었다. 거짓말의 잔해가 석순이 되어 솟아난다. 성에와 고드름 그리고 석순. 그 사이에 둘러싸인 그는 얕은 동굴이 되어간다. 그의 주변에는 늘 얼음 비가 가루처럼 날렸다. 사람들은 말라붙은 살점들 같다며 도망쳤다. 모난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똑떨어진 순간. 얼굴 위에 처음으로 덧입혀진 무표정의 가면은 결국 외딴섬으로 도망치며 온갖 고통을 입에 물고 헐떡였다. 넘어진 발걸음. 그의 얼굴은 촛농처럼 녹아 흘러내리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다시 녹아 흘러 그대로 굳어버리면서 멎어갔다. 그는 가면을 벗지 못하고 주저앉아 꿇은 무릎에 얼굴을 박아 꺼억꺼억 울어댔다. “- — —- 싶어” 잘근잘근 이로 짓이겨지면서 젖어가던 무릎이 들은 소리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괜찮아요”
가면에 먹혀버린 - 동굴 입속에 아늑히 자리 잡은 - 그는 슬픈 오르골이 되었다. “나는 괜찮아요” 같은 음만 반복하는 오르골. 가끔 끼릭- 빗겨나곤 하는 마찰음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의 곁에는 유령이 맴돌았다. 우울의 무덤에서 다시 태어난 우울이었다. 불쌍한 그 아이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고, 잡힐 수도 없었는데 유일하게 매만질 수 있는 게 그런 슬픔들이었다. 외로웠던 유령은 오르골의 걸쇠를 계속해서 돌려놓았다. 타다다-다다다-탓-다다다다. 거짓말은 언제 생겼을지 모를 수레바퀴의 박자에 맞춰 정직하게 소리를 냈다. “나는 괜…찮아요, 나, 나는괜찮…아요난 (…) .”
다 녹아내린 촛농 더미를 닮은 오르골과 심지 같은 손가락을 흐물거리는 유령. 그 둘이 있는 풍경은 꽤나 평온했다. 고요한 곳을 채우는 반복적인 음은 그 자체로 평화로웠다. 짙은 입김이 그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왜 이제야 그를 궁금해하는 거야.
시간은 단단하게 굳어간다. 여전히 성에가 끼었고, 이따금 고드름이 후드득 떨어졌고, 쑥쑥 자라 석주가 된 거짓말의 잔해는 어엿한 기둥이 되어갔다. 이미 잊힌 그의 존재는 암흑 속에서 수마를 헤맸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나조차도 그 조각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기에 그의 얘기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그나 그의 가면이 아니라, 이 둘이 하나가 되어버린 또 다른 조각 같은 생명체가 “나는 괜찮아요”를 되뇌는 광경뿐이었으니.
그가 반복하는 목소리는 깃털 같았다. 새의 날갯짓을 따라가지 못하고 땅에 버려진 깃털. 어디로 떨어지든, 주워지든, 사라지든 상관없는 무의미한 무명의 깃털. 조각 주변에는 그런 깃털이 가득했다. 투명한 새들이 남기고 간 영롱한 조의들.
뭉근한 조각 같은 오르골 위에는 동그란 빛이 덩그러니 떠있었다. 발치에는 무성한 담쟁이덩굴들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그 덩어리를 안아주고 싶은 건지. 유령은 아주 천천히 줄기들을 데려오고 있었다.
“거짓말은 나쁘니까 튀어나오기 전에 잘 숨겨두어야 해”
조각이 아닌 인간이었을 적, 그는 그런 독백을 읊조렸다.
그는 거꾸로 뒤집힌 천국으로 고꾸라졌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