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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May 07. 2023

3. 박하향을 삼킨 하얀 그림자

이명에 둘러싸인 세상에 갇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동공을 까맣게 빛냈다.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3-
박하향을 삼킨 하얀 그림자


illustration by sasa

빗소리가 울음소리를 감싸 안아 줄 적에. 까만 밤 대신 적막의 장막이 숲에 길게 드리웠다. 비와 눈물이 한 데 뒤섞이기 시작했고, 꽃을 찾는 나비 마냥 슬픔을 찾아 숲을 배회하던 유령들도 무덤 아래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자그마한 숨소리도 적막에 뒤덮일 때 우물곁에는 하얀 꽃양귀비가 어룽거렸다. 우물 위의 나무가 망각을 닮은 깊은 꿈을 꿀 적에는 하얀 빛을 총총 떨구는 꽃양귀비가 외로운 숲을 맞이했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숲엔 박하향이 가득했다. 몽중을 헤매는 존재들의 눈가가 시린 박하 향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 비가 그친 후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눈물을.


꽃양귀비는 우물 위에 자란 나무 탓에 이토록 아린 향을 품고 말았다. 나무가 우물을 움켜잡고 버티며 뚝뚝 떨군 아픔이 잔뜩 스며든 땅. 그 위에 자란 하얀 눈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먹으며 자라났다. 그의 잔향은 너무도 쉽게 잦은 눈물을 남겼다. 매일매일이 안개 속이었다. 내가 가진 불가피한 슬픔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아파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했던 꽃양귀비는 비가 올 적에야 빗소리를 위안 삼으며 형형히 빛날 수 있었다. 나의 아픔이 여기에 있어요. ‘나’말고, ‘나의 아픔’이. 하얗게 빛나는 아득한 잠의 친구는 땅속에 흐르는 아픔을 제 잎맥 사이사이에 고스란히 스며내었다.


외로운 꿈에 머무는 건 오로지 그 자신뿐이었다. 나뭇가지처럼 갈래갈래 찢어지고 제 방향대로 뻗어나간 ‘나’들을 만화경처럼 맞이한다. 외로운 꿈에는 눈이 내렸다. 여린 줄기에 하얀 눈을 매단 양귀비는 빗방울을 맞아 꾸벅이는 고개로 홀로 남은 꿈을 꾸고 있을 나무를 바라보곤 했다. 가끔 꽃잎에 물방울이 크게 고이면 고개를 숙여 나무에게 기댈 수 있었는데, 귀를 가까이 대면 나무 안에서 나이테가 새겨지며 나뭇결이 갈라지고 솟아나는 미미한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얼마나 부풀어 오를까, 갈라진 생채기가 깊진 않을까. 저와 고통을 나누는 말 없는 친구의 괴로움을 가늠해 보며 적막을 살아냈다.


사실 다정한 꽃양귀비의 시선은 무심하고 초연했다. 숲에서 살아남으려면 고요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햇빛을 맞이하고픈 마음 같은 건 푸르러야 할 이파리에 허연 고름만 남겼다. 하얀 꽃양귀비는 칙칙한 우물과 나무의 커다란 녹음 아래서 흘러가는 아픔을 그저 머금기로 했다. 우아한 자태로 땅을 기는 우울들과 함께했다. 여리고 초연하게도 이 숲이 품은 세계를 숨 쉬듯이 받아들였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던한 마음이 여기에 자라고 있었다.


illustration by sasa
illustration by sasa


하얗게 질러버린 낯이 숨이 턱턱 막히는 괴로운 시간을 증명한다. 까만 꽃술은 공허한 동공을 닮았다. 하얀 꽃양귀비는 점점 하얀 꽃양귀비들이 되었다. 나의 나. 나의 또 다른 나. 너의 나. 나의 너. 우물 주변으로 곳곳에서 피어난 꽃양귀비들을 서로를 비추어가며 옅은 군락을 이뤘다. 우물에겐 하얀 그림자가 생겨났다. 하얀 세계.


우연이 불어오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긴 줄기를 숙여 마른 입술을 닿는 대로 겨우 맞대어 본다. 나. 나. 나. 오직 나뿐인 이 세상 속에서 모두 함께 외로워했다. 으레 영혼을 죽게 하기 쉬운 것들이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꽃양귀비는 지나치게 느려진 외로움을 제 시간 삼아 내가 나를 조금씩 좀 먹을 수 있는 방법론을 연구하고 몸소 실험했다. 하지만 여리고 초연한 꽃양귀비는 서로를 죽이기엔 부드러운 줄기와 잎만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를 할퀴기는커녕, 우연이 아른거리는 사이에서 서로의 이명만 울려 댈 뿐이었다. 


이명이 빗소리보다 크게 울린다.

꽃잎은 자꾸만 뿌리 뒤로 숨고 싶어 했다.


그들의 하얀 세계는 그렇게 한 번 더 낮게 고립된다. 이명에 둘러싸인 세상에 갇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동공을 까맣게 빛냈다. 목소리와 박하 향이 입안에 고인 채로 뻐끔뻐끔. 이 숲속은 슬픔만 가득한 것이 꼭 연못 아래 같았다. 땅 위에 자라는 꽃이라면 꿀 수 없을 수중의 꿈을 그렇게 찾고 말아 마음속이 헤집어지곤 했다. 꽃양귀비의 숨은 물속에서 새는 공기처럼 가늘고 동그랗게 부서져 허공에 흩어졌다.


잘그락잘그락. 이명 사이로 자꾸만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 온갖 아픔이 흙의 내음을 반죽 재료 삼아 아름다운 모습으로 응결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명은 바늘이 되어 구슬이 된 우울을 계속 꿰어찼다. 영롱한 구슬의 울림과 빗소리가 부딪치며 말간 비명을 낼 때 유령들은 우물 밖으로 나와 그 구슬들을 모두 훔쳐 갔다.


이곳의 우울은 누군가에겐 은밀하고 아름다운 비밀이었던 것이다.



illustration by s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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