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찬 Jun 17. 2023

6. 짓궂은 유령에게

생각하다 보니 눈을 뜨고 나서도 악몽이었네 나는.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6-
짓궂은 유령에게


안녕. 나쁜 녀석들아.

오늘도 내 주변을 맴돌려던 참이었는지 모르겠어. 내 곁에 둔 적 없는 희미한 궤도를 그리면서 말이야.


illustration by sasa


너희들에겐 처음 남기는 쪽지네. 물론 이걸 읽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너희가 내 글씨를 읽을 줄 아는 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아마 그다지 의미 없는 고민이겠지. 너희는 이 쪽지와 상관없이 내가 무슨 마음인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까. 잠결의 장막 너머에서 눈을 뜰 적마다 너희를 정말 많이 목격했어. 얼마나 많이 내 곁을 그리 떠돌아다녔던 거야.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지는 나보단 너희들이 더 잘 알 테지. 그리고 무엇보다…내가 너희를 얼마나 보기 싫어했는지도 알 거야.


난 너희들을 아주 깊이 숨겨두고 외면하고 싶었어. 왜냐고? 단순한 이유지. 우린 참 못났잖아. 못났다는 건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고.


너흰 외면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겠지. 그래, 미안한 마음도 있었어. 하지만 잊고팠던 기억을 자꾸 내 앞에 가져와 품에 안겨주곤 안녕! 이라고 말갛게 웃어 보이는 너희들이 너무 밉고 힘들었는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 기억들, 느끼고 싶지 않은 아픈 감정들이 너희들 때문에 불쑥 떠오를 때마다 한없이 작아지고, 또 작아지다가 사라지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었으니까.


바보같이 아파하면서 모진 장난을 당하기만 할 바엔, 너희를 잔뜩 미워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 그래서 저 어두컴컴한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은 거야. 이토록 너희와 멀어지고 싶었는데, 왜 애써 장막 너머로 나타나서 내게 악몽을 안겨주고 도망치는 거야. 눈을 감고 나면 꾸는 몽상 속에서 마음이 아릴 때마다 너희를 찾아 두리번거렸어. 나도 모르는 새에 또 내 꿈을 망치고선 도망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illustration by sasa


너희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덕지덕지 악몽의 향이 배여. 아주 시린 박하향. 눅눅한 이끼 내음. 악몽에서 벗어나 눈을 뜬 후에도 시린 향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잠결을 헤매지. 눅눅한 이끼 향이 코와 입을 막으면 꼭 물속에 침잠한 듯한 기분에 잠겨버리고. 너희에겐 이 악몽들이 콧잔등을 톡 건드리고 가는 작은 장난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눈 뜨고 살아가는 시간이 마구 휘청일 정도로 버거운 일이야.


얼마나 버겁냐면, 병에 걸린 것 마냥 잔기침을 토해. 얼굴이 붉어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여. 몸에 들어온 나쁜 것을 밀어내려고 기침하는 거라는데. 이상하지, 그 눅눅한 박하향만 맡으면 기침 끝에 들숨을 껄떡이며 향을 오히려 먹고 또 먹는 내가 있어. 그 향기를 먹은 나의 혈관은 저 깊은 아래를 향해 쑥쑥 자라나지.


숨이 벅찰 정도로 공기를 마시고 뱉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버리고 마는 거야. 너무 배부르다고. 정말 이상한 악몽이야. 휘청인 시간이 차츰 잔잔해지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뭘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정원을 거닐기 시작하지. 영문도 모르고 무거워진 몸을 질질 이끌면서. 생각하다 보니 눈을 뜨고 나서도 악몽이었네 나는.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아니야, 너희 때문이야.

짓궂기 짝이 없어.


가끔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물방울이 잔뜩 맺힌 꽃들을 발견하곤 해. 혹시 이것도 너희 짓이니? 가만히 향을 맡으면 이끼 향이 까맣지 않고 새하얀 게 너희들 소행이구나 싶었거든. 어차피 그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잠결의 장막 너머에서가 아니라 내가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정원에서 만나보고 싶어. 얘기도 나누어 보고 싶고.


새삼스럽긴 한데, 돌아보면 우린 서로에게 일방적이기만 했잖아. 그런 관계의 방식을 생각하면 우리 꽤나 닮아있기도 하네.


아무튼, 이 쪽지를 보게 되면 어느 방식으로든 대답해 줘.


블루벨에 달아둘게. 물방울이 맺혀있으면 너희가 다녀간 걸로 이해하면 되겠지? 아마 너희를 본다면 그게 다음 악몽일 거란 각오 정도는 하고 있을게. 그 정도는 마음먹을 수 있으니까.


응? 왜 블루벨이냐고? 그냥. 닮았어. 너희를. 그래서.


-사사



ps.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희는 그 장막 너머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거야? 혹시 장막을 직접 드리울 수도 있어? 아니면 우연히 드리웠을 적마다 나를 찾아온 거야? 그 장막 아래에 들어선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꿈만 꿀 수 있어서, 이런 이야기들도 궁금하다.


illustration by sasa



작가의 이전글 5. 무성한 모양을 한 새하얀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