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찬 Jul 07. 2023

7. 그믐달의 왈츠

끝없이 시연되는 새벽. 우울의 잠긴 정원은 아름다웠다.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7-
그믐달의 왈츠


*

illustration by sasa


끌어 안은 무릎 너머는 나의 요람. 뭉툭한 궤도를 그린 두 팔 안에 무릎과 얼굴이 빠듯하게 들어선다. 작은 품 안에 드리운 까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울음소리. 손등과 다리를 적시는 눈물의 온도가 뜨겁다고 실낱같은 핑계를 댄다. 화상은커녕 붉은 자욱도 못 남길 온도가 지나치게 뜨거워서 어깨를 들썩인다. 오로지 제 피부 사이에서만 자신만을 적셔가며 한없이 메말라가는 영혼이 여기에 있다. 숨을 쉬려고 두텁게 고인 슬픔을 쏟아내고자 몸부림치지만, 끝없이 추락하는 영원의 수면 그 깊은 아래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영혼이.


아, 너무도 초라한 존재구나.

아, 아무리 손 뻗어도 안을 수 있는 이 하나 없구나.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잔존한 외로움과 생채기에 진한 미련을 남기고 있구나.

아. 아무리. 어떻게 해도. 너무도. 쓰라린. 무용하게도. 침잠에. 고인. 괴로움. 외로움. 외마디.


이름 없는 풀들에 떨어지는 물방울. 그 슬픔은 너무도 짙어서 공기로 승화되지 못하고 액체로 응결되다가 끝내 물구슬이 되고 만다. 박하향이 잘게 흩뿌려진다. 향기 가닿은 곳곳은 눈물로 반짝였다.



*

그믐달이 드리운 축복 아래선 숨 쉬는 모든 것들이 하염없이 슬퍼할 수 있었다.

이곳은 영원한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

서쪽으로 두 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적 없는 그믐달을 읽는 방법이다.


정원 북쪽 한가운데에 솟은 절벽은 달을 읽는 척도다. 서쪽으로 한 뼘, 두 뼘, 세 뼘. 서쪽 끝에 닿으면 다시 절벽을 지나 동쪽으로 한 뼘, 두 뼘, 세 뼘. 새로이 떠오르거나 저문 적 없이 가장 높은 하늘에서 호선을 그리며 맴돌기만 하는 그믐달이다. 덕분에 새벽은 가장 깊은 적막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그믐달은 정원 한가운데에 고여있는 호수 위에서만 제 궤도를 그렸다. 호수가 그믐달을 제 품에 가둔 건지, 그믐달이 호수에게 시선을 빼앗긴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호수를 무대 삼은 그믐달의 왈츠. 총총히 눈을 깜빡이는 빛무리가 그 몸짓의 선율이 되어 주었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숨죽여 그 공연을 목도하였다. 영원한 관객과 영원한 무용수. 이 세계를 존재케 한 시간을 짓는 우아한 몸짓. 끝없이 시연되는 새벽. 우울의 잠긴 정원은 아름다웠다.


illustration by sasa


이곳을 어루만지는 희미한 달빛 아래서 모두가 생애의 주기를 밟아나간다. 이름 없는 풀들이 자라나고 스러지기를 반복하고, 몽상으로 영글어진 꽃망울은 자신의 개화를 기다린다. 그곳을 배회하는 이는 정원에 눈물을 한 아름 내어주다가 얻게 된 메마른 영혼을 지니고선 우울 사이를 배회하길 반복한다. 한 점의 방해도 없이 제 슬픔을 흘려내고 몽상으로 담아내가며 감정의 궤도를 그려나가는 일은, 그믐달이 드리운 축복 아래서 비로소 이뤄질 수 있는 꿈이었다.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제 그림자 위에 하염없이 머물며 더 깊이 침잠하기 위한 느린 울음을 터뜨렸다.


*

눈에서 넘쳐흐른 호수 물이 죄 쏟아지고 빈 유리 껍데기의 모양이 될 때 즈음에야 눈물이 멎는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동공. 그 동공 위로 고인 어린 연못을 눈동자에 품고선 요람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물속에서 수면 위를 바라보듯 모든 것이 물결 모양으로 일렁인다. 눈에 뵈는 모든 단상들마저 나와 함께 침잠하려나보다. 저 나무도, 호수도, 풀과 꽃도, 절벽도, 구름도, 안개도, 나도, 단단하지 못해 허물어진다. 가만히 멎어있지를 못해 흐르게 된 모든 것들은 달빛이 흩뿌려 놓은 윤슬을 한 겹 덧대어 입는다. 정원의 풍경은 그렇게 완결되곤 했다.


칙칙한 내겐 잘게 부서진 빛 조각들이 너무도 찬란해서 홀린 듯이 사방을 응시한다. 호숫가 물녘에서 빛의 파도를 맞이하는 사이, 나는 결국 물의 모양이 되어 한참을 일렁인다. 지느러미를 가진 나의 아이가 잠시 내 안에 들어선다. 나는 이 정원이 되고, 나의 우울은 환상을 닮아가곤 했다. 그 즈음이면 이 슬픔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또 다른 영원의 궤도가 뭉툭하게 그어진다.


애초에 나는 슬픔이었던 것처럼.

슬픔이 없는 나란 건 내가 아닌 게 되어 버린 것처럼.


불분명한 공허를 느끼고 있자면 빈 유리 껍데기 안에 박하향이 들어찬다. 그 아래엔 새하얀 이끼 향이. 온갖 시리고 눅눅한 내음이 들어차면 잔기침이 쏟아진다. 지난 우울은 그런 생채기를 남기곤 했다. 풀밭에 엎드려 기침을 토한다. 배가 욱신거리고 목구멍이 시큰거릴 때가 되어서야 차츰 멎어가는 기침. 되었다. 다음 슬픔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유리 껍데기 안에 물이 고인다. 구름이 되었다가 일렁이는 물이 되고, 이따금은 얼어버릴지도 모르는. 불규칙한 승화가 반복되는 우울의 생애를 기다린다. 그믐달이 절벽을 지나 동쪽으로 한 뼘, 다음 박자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illustration by sasa
작가의 이전글 6. 짓궂은 유령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