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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Aug 27. 2023

9. 포말 곁의 수선화

물 비린내보단 소금 향이 익숙한 짙은 줄기가 더 올곧게 선다.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9-
포말 곁의 수선화




호수가 찢어진다.

필히 우연으로 응어리진 물 그림자.

그 위에 아스러진 모습으로 눈을 깜빡인다.

꽃잎처럼 보드라운 파편 속에서 유영하는 나. 나. 나.


illustration by sasa


포말은 파도가 울컥거리며 남긴 목소리. 하얗고 봉긋한 잔해들은 성에를 닮았다. 우연이 빚어 논 조각상들. 물녘에 먼저 도달한 미적지근한 습기가 우연을 핑계 삼아 살금살금 조각들을 짓누른다. 잘게 바스러진 얼음 가루 소리. 숨을 몇 번 쉬었을까. 채 피어나지 못한 목소리들이 수풀 아래로 가라앉는다.


평생토록 이 사건을 목도해온 기둥 끝의 별 그림자 하나.


살근살근 다가온 물결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젠 잠에 들 시간이라며 눈을 감으면 줄곧 발 디뎠던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어쩌면 소멸이란 건 이런 모습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도 이미 소멸된 것일지도 모르지. 울컥이며 밀려들어오더니 손에 잡히지 못할 편린으로 잘게 부서지고 마는 시간들을 밟다가,


가장 너른 품에 이르렀을 때 비밀이 돼버리곤 숨죽여 사라지는 것.

그 후에 우연이라 이름 붙인 숨결을 엷은 비늘의 모양으로 도려내 허공에 띄워 올리는 것.

별자리가 된 물고기의 잔해는 아무도 모르게 호수로 돌아간다.

여기 새벽을 붙들어 논 달빛은 영원했으니. 그렇게 영원히.


물의 꿈을 꾼다. 물이 흐르는 혈관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생애였으니. 호수가 허락한 숨이었으니. 슬픔과 미적지근한 공기와 겨우 눈빛을 내비치는 그믐달과 하얀 심장 박동으로 파도치는 기이한 새벽이 자아내는 생명들의 초상. 서툰 의지가 불러온 미완성의 다정함들.


이 모든 게 나였다.


움츠린 눈꺼풀을 펼쳐내었을 때부터 마주해 온 이 호수는 묵묵히 저만 비춘다. 하얀 거품 사이사이에 쪼개져 자리 잡은 나의 일부들을. 곳곳에 흩어진 조각들을 그러모아 그려보는 내 모습은 듬성듬성한 해면 같았고, 어쩌면 나를 밝히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 여기 발목 아래에 살아있다고 여겼다. 지나친 목전에서.


나의 죽음도 포말을 닮았겠지. 물결 구석구석에 낀 저것들이 내 몸 구석구석에도 끼어있겠지. 그래서 이따금은 잎맥 사이에 낀 터져버린 공기 방울의 외마디를 견뎌내야 했던 것일지도 몰라. 그래도 이 정도면 소란스럽다기보단 퍽 아름답지. 물 비린내보단 소금 향이 익숙한 짙은 줄기가 더 올곧게 선다. 꾸준한 물의 파쇄 음에 잎들이 살랑거린다.


illustration by sasa


이 광경은 나를 먹고 자란다.

고요하게 말려들어가는 포말의 속삭임으로 하얗고 둥근 모서리를 지닌 별의 모양을 잊어간다.


까만 사포 위에 잔뜩 쓸린 생채기로 그려진 물결 위에서 나를 찾으려는 환상통. 숨죽여 다가왔다가 인사 건네기도 전에 사라지는. 밀려나며 살아지다가 부서지며 허공에 흩어지는. 쪼개진 영혼들. 물방울로 잘게 바스러지고 마는 눈동자들.


제 뒤편으로는 살아있다고 아우성치는 더운 숨이 밀려온다.


illustration by s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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