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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Sep 08. 2023

10. 몽상가의 정원

물과 마음의 거리는 하나였다가도 헤아릴 수 없는 갈래들로 이어진다는 걸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10-
몽상가의 정원


illustration by sasa


물이 가득하다. 물의 계절로 읊어지는 세계. 어쩌면 여긴 정말 물속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닿아보지 못한 영원한 새벽의 심해. 우거진 산호초 사이에 숨은 미세한 생태계. 아님 호수 가장 깊은 아래 침잠한 자그마한 빛.


일렁이는 수면에 비친 얇은 세계를 그린다. 호수 안에 있는 세계 안에 다시 호수가 있어서,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영혼의 깊이로 숨 쉬는 세계.


illustration by sasa




호수 남쪽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어. 별을 잡아먹을 듯이 높게 자란 유칼립투스 가지가 빽빽이 벽을 세워준 오두막. 사실 벽이라고 얘기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오두막을 포근하게 끌어안아주는 모양새에 가깝지. 오두막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정원의 모든 모습이 보여. 그래서 거기가 몽상들을 지켜보는 자리가 됐어. 아마 이곳이 정원 안에서 정원으로부터 가장 먼 곳일 거야.


기억해. 모든 물과 마음의 거리는 하나였다가도 헤아릴 수 없는 갈래들로 이어진다는 걸.




참 많이 아파와. 숨 쉬는 게 말이야.


이끼 향에 익숙해진 몸으로 부드럽게 마시던 눅눅한 공기가 따가워질 적에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조금 있다가 아플지도 몰라. 여태 쌓아온 경험에 기대 그 미미한 공기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들숨 그리고 날숨. 눈가가 시큰거리면 이미 늦었다. 사실 알고서도 그냥 아프도록 둘 때가 허다하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에 겹겹이 파고든다. 슬픔 아픔 고통 그런 것을 두서없이 되뇌며 해대는 잔기침. 목구멍에 남겨진 생채기가 벌어지는 생경한 느낌에 어지러울 땐 주변에 자라난 풀들을 뜯기 시작한다. 풀 향이 짙은 것일수록 좋다. 무기력한 눈빛, 꼭 잠에 들 것처럼 - 아닌가 이미 잠에 들었나 - 그런 착각을 쉬이하는 걸 보니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한 움큼 뜯어내면 그 위에 고개를 파묻는다.


내가 너희처럼 풀로 태어났으면 향기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그저 산소만 취하고 땅에 흐르던 순수한 물을 받아들이며 살아있는 몸을 느끼며 머물 수 있었을까.


꿈을 꾼다. 그들의 옅은 생애를 취하면서 그들과 닮게 된 나를 그리면서. 풀 비린내. 꿈과 이곳을 오가는 새새 몽상으로 물든다.


눈을 꾹 감고 몸을 수그리고 입도 막고선 다 잊을 때까지 사라지고 싶어.




오늘은 풀 다발을 엮었다. 깃털이 살랑이는 엷은 공기에도 잔뜩 떨리는 사소하고 벅찬 마음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어서.


박하향이 짙었거든.


이름 모를 풀들을 따다가 다발을 엮어 내 머리맡에 두고, 이끼 한 줌을 뜯어다 생채기 위에 덮어주었다. 널 위한 포옹이야- 속삭이며. 정원은 그제야 담담한 기류로 돌아온다.


호수의 온도를 확인하러 가야지.


파도 덕분에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호수라지만, 숲에 생채기가 날 적이면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저곳의 나. 내가 여기 있으니까.




풀 다발이 곱게 마르면 오두막 유칼립투스 곁에 뿌려준다. 보이지 않게 많은 것이 쌓인다. 형태 없이 존재할 수 있음은 툭하면 마음이 발갛게 부어올라 온갖 세상을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들에겐 축복이다. 그 축복 덕에 많은 몽상이 이곳에 얽혀 공존한다.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나를 자아내는 존재감 여럿. 내가 이곳을 자유롭게 배회할 수 있음은 숨 쉬는 모든 것들로부터 받은 마음이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눈동자가 매일 오두막 창가부터 희멀건 지평선까지를 부지런히 오간다.




달아 안녕.

절벽과 그믐달이 같은 축에 올곧이 서 있으면, 나도 그 축을 찾아가 호수 앞에 나란히 선다.

우연과 필연을 눈가에 담고선 어린아이처럼 헤실 웃어본다.


illustration by s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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