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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Sep 10. 2024

전작이 좋다고 본작도 좋으란 법은 없다.

[북리뷰] 한미화. 유럽 책방 문화 탐구. 혜화1117. 2024.

1. 언제나 그렇듯이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 책을 굳이 읽어볼 가치가 있을까를 무척이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한미화의 책인데'라는 마음에 펼쳐 들었습니다만, 짜증이 솟구치는 독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책방탐방기들이 그러하듯이, 중구난방의 번잡스러움에 어질어질해졌습니다.


 책방탐방기만 여러 권을 읽다 보니, 그 책방 탐방기란 것이 갖는 문제점은 대체로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우선 일회성 방문이나 두어 차례의 글쓰기를 위한 방문만으로는 해당 장소의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치밀한 사전조사를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누군가의 일회성 방문으로 만들어진 기사나 책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 텍스트들은 같은 ‘유전 형질’을 갖고 제대로 된 분석 없이 자기 복제를 하곤 합니다. 기사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시뮬라시옹은 어느새 실물의 지위를 대체합니다. 이른바 ‘우라까이’에 익숙해진 무책임한 텍스트 생산자들이 오정보를 양산합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실태(失態)를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저 역시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몇몇 곳의 책방들의 탐방기를 쓰기도 했었습니다만, 이런 이유로 탐방기 쓰기를 때려치웠습니다. 기껏해야 두어 차례 방문하는 것으로는 책방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책방지기와의 짧은 대화 역시 그의 운영 철학을 파악하기엔 무리입니다. 적어도 사전 인터뷰-본 인터뷰-추가 인터뷰로 구분된 3차례 이상의 인터뷰와 그에 수반한 장소의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 번잡스러운 과정에 흔쾌히 응해줄 사람들이 별로 없을뿐더러, 운 좋게도 책방지기의 호의에 기댈 수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적’인 훈련을 거친 글쓴이가 되는 건 더 힘듭니다. 제가 탐방기를 쓸 때 어떠했는지를 잘 알다 보니, 남들의 탐방기를 읽으면서 같은 문제들이 보였습니다.


 둘째로는 책방 탐방기라는 글의 성격이 제대로 규정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어쭙잖은 여행기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나름 책방 나름의 특질을 나누어 구조화한다고 해도 이내 개인적인 기행문으로 회귀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이는 ‘취재 과정’의 한계 때문으로 보입니다. 여러 장소를 두루 방문해야만 하기에, 짧지 않은 ‘여정’은 필수적입니다. 이 여정은 글 쓰는 이들의 낭만주의적 욕망을 여간 자극하는 게 아닙니다. 글의 맥락과 관계없는 개인적 감상이나 여정을 다루는 오로지 심미적이기만 한 문장들이 수시로 개입합니다. 핵심 정보와 비슷한 하중으로 정보의 무게중심을 흩뜨리기 때문에, 결코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여행기를 쓸 거면 여행기에 걸맞은 문장력을 갖추던가, 탐방기를 쓸 거면 탐방기에 걸맞은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전문지식에 근거한 분석은 타인의 글에 기대고 문학적 글쓰기는 과잉된 감정이나 공허만 문장으로 범벅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경우가 잦습니다.


 세 번째는 전체적인 맥락을 해치면서까지 무리하게 들어오는 ‘분량’입니다. 이는 저자의 과욕과 편집자의 무능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참사입니다. 이를테면 ‘당인리책발전소’ 김소영 대표의 책, 『진작할 걸 그랬어』가 그렇습니다. 3년 전에 닥치는 대로 책방에 관한 책을 읽던 때였던지라, 재미있게 읽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만들어진 책이라고 평가할 순 없었습니다. 그때의 불만이 리뷰에 좀 녹아들어 있습니다.

 저자는 자기가 정리한 원고가 남김없이 책에 녹아들기를 원합니다만, 편집자 입장에선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닌 듯합니다. 저자에게 들러붙은 ‘지식의 저주’는 글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맥락을 형성해서, 편집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뜬금없는 비약을 경험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럴 때는 편집자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고, 이를 겸허히 수용하는 저자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단단하게 집중된 한 권의 책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2. ‘혹시나’는 대체로 ‘역시나’로 끝난다.


 이 책은 학술출판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사실을 다루어야 하는 저자의 책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책을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찾아보면, 저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인터넷을 베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 사실 확인도 없는 전문(傳聞)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글에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짜증이 확 치밀어 오릅니다.


 부키니스트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긴 역사를 지녔다. - 196쪽

 안 그래도 불만스러웠던 읽기가 이 문장에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책임하고 게으른 문장에 책장을 덮고 화를 삼켜야 했습니다. 우선 부키니스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아닙니다. 1991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파리의 센 강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주역사유적지구나 백제역사유적지구처럼 하나의 구역이 선정된 겁니다. 그래서 201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정부는 부키니스트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으로 선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2년 전에 읽었던 김윤아의 『서점 여행자의 노트』에서도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저자의 게으름과 무책임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책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 책의 권말에는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팩트 체크’를 했다는 증거이자, 부정확한 사실이라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 ‘인용해 온 책의 저자 책임’이라는 면피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키니스트에 대한 설명에서는 각주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각주 없는 인용’이 무조건 표절이 되는 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무책임한 표절이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주로 영문 위키피디아의 오역으로 이루어진 한글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아무런 검증 없이 전재(轉載)하면서 참사는 발생합니다. ‘저작권이 없는 글’이다 보니,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아주 쉽게 옮겨 씁니다. 특히나 웹환경에서 마주하게 되는 숱한 ‘우라까이’ 글들은 ‘어느 이름 없는 블로그’나 ‘공공기관의 게시글’로 박히면서, 진짜 정보를 잠식하곤 합니다. 


 프랑스에서도 1750년까지 작가의 원고료가 낮아서 루소는 1755년에 출간한 『불평등 기원론』의 저작권료로 25유로를 받았을 뿐이다. - 296쪽

 이 기가 막히는 문장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인용에는 각주가 달려 있었습니다. 해당 도서를 찾아봤습니다.

 루소의 경우 『불평등 기원론』으로는 25 루이를 받았고
- 뤼시앵 페브르, 앙리 장 마르탱. 『책의 탄생』. 돌베개. 2014. 290쪽.

 25 루이가 25유로가 되어버렸던 겁니다. 해당 페이지에는 당시의 프랑스 화폐단위가 나옵니다. 루이, 리브르, 에퀴인데요, 1 루이(Louis d’or)는 금 8.1580g으로 24 리브르(livre)이며, 1 에퀴(écu)는 6 리브르였습니다. 이제 현재의 유로 단위로 환산하려면 두 가지 가치 비교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금화의 금 가격 그 자체를 변환해 볼 필요가 있고, 여기에 인플레이션 요소도 가중하거나 경감해야 합니다. 정확한 환산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니 단순히 금값으로 계산해 보면, 14,874유로 정도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1750년까지도 원고료가 전체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는 기술에 반하는 내용이 됩니다만, 적어도 “25유로”라는 터무니없는 표현과는 맞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모순적이게도, 저 역시 이 환산을 위해 영문 위키피디아와 챗GPT를 이용했습니다.)

 

알고 있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이 정도라면, 제가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오류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3. 맘에 들지 않는 책을 끝까지 읽는 이유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까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까는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책을 읽다가 짜증이 나서 까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뿐입니다. 보통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여러 분들이 그래도 된다고들 합니다.

 책도 마찬가지다. 재미가 없으면 도중에 그만 읽어도 된다. 제대로 된 책이라면 그렇게 하더라도 독자에게 무언가를 남길 것이다. 
- 기시미 이치로 著/전경아 譯.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인플루엔셜. 2020년. 53쪽.
 책이 충분히 재밌지 않으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 책을 그만 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됩니다.
- 김영하. 읽다. 문학동네. 2015. 81쪽.

 굳이 괴로운 읽기로 자신을 고문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꾸역꾸역 읽고 리뷰를 쓰는 미련을 떨곤 합니다. 독서는 괴롭고, 리뷰 쓰기는 더 괴롭습니다만,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치 종기를 짜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실패학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둘째는 그 와중에도 ‘주워 먹을 게 있을 때’입니다. 이번 책은 이 이유가 좀 더 컸다고 봅니다. 『유럽 책방 문화 탐구』라는 제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국 책방 탐방기’였지만, 그곳들을 통해 고민할 거리는 제법 있었습니다. 그 고민들이 마침내 정리되는 것이 다음 페이지였습니다.

 지역 책방은 크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바스나 옥스퍼드처럼 손꼽히는 관광지에 있는 책방이다. 여행지에서는 많은 이들이 비교적 주머니를 쉽게 연다. 아름다운 지역에서 만나는 책방에서는 기념할 만한 걸 사고 싶어 하니까. 제주도를 떠올리면 쉽다. 제주도에 책방이 많듯 휴양지나 관광지 등에도 책방이 꽤 있다. 이들 가운데는 런던이나 파리의 비싼 임대료를 견디다 못해 지역으로 이전한 곳들도 있다. 20여 년 동안 런던 블룸즈버리 중심가에 있던 페미니즘 책방 ‘페르세포네북스 Persephone Books도 2021년 4월 바스로 이전, 로열 크레센토로 가는 골목에 자리를 자복 독자를 만나고 있다.
 문화적 기반이 갖추어진 지역 도시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대학이 있거나 은퇴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라면 지역 책방의 존재 이유가 분명해진다. 앞에서 살핀, 영국의 일리나 세인트앤드루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또는 프랑스의 보르도 등도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지역에서의 책방들은 그 수는 점점 줄어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독서가와 함께 책의 세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크레디톤이나 페나스에서처럼 철저하게 지역민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책방이 있다. 이런 책방은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한다. 지역 사회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는 고스란히 책방의 존재 이유로 돌아온다. 책방과 지역이 서로 상생하며 발전하고 궁극적으로 지역을 지켜낸다. -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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