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리체어스. 2018. "여러모로 난감하고, 이래저래 고민스럽다"
"선생님, 책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잘 쓰셨던데요?"
이렇게 칭찬을 건네며 작가에게 아는 체해볼 요량으로, 교보문고 영등포점까지 직접 가서 사들고 온 책이었다. 리뷰를 쓰고 난다면, 그러긴 어렵게 될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수다모임이 있다. 원래의 목적은 저기 산꼭대기에 있는데, 모임 자체가 그리 체계가 잡혀 있질 않아서 각자도생의 글쓰기 작업을 수행해야 할 듯하다.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모임에 참석하면서, 늘 뒤로 재쳐두었던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관점에서 이래저래 고민해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모로 난감하다.
어떤 책을 읽든, 알고 있는 사실과 전면 배치되는 기술을 접하게 되면 제법 당혹스럽다. 그리하여 그게 오류라는 사실을 확정하게 되면, 책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찍게 된다. 그다음부터 나오는 새로운 사실들 하나하나가 재검증의 대상이 되면서, 독서는 난맥상에 빠지게 된다.
"부키니스트는 작은 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Buch에서 나온 말로, 작은 책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 12쪽
순간 숨이 막힌다. 독일어의 지소사는 '-lein'을 쓰기 때문에 작은 책이라면 Büchlein이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고 들어온다. 어원을 잘 다루는 편인 메리엄웹스터사전에서나 여러 게시물들에서나 부키니스트의 어원은 플람스어에서 찾고 있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에 걸쳐져 있는 땅인 플란데런(Vlaanderen. 불어로는 플랑드르, 영어로는 플랜더스, 일본어로는 후란다스)에서 쓰는 언어인 플람스어 boeckin이 그 어원으로,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책이란 단어 boek에 지소사가 붙은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난데없는 독일어 어원설보다는 훨씬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런 의미를 살려 부키니스트 거리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14쪽
들어본 적도 없는 발언이 또 나온다. 물론 나라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모두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사이트를 찾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1991년에 등재된 것은 파리의 센 강변(Paris, Banks of the Seine)이었다. 부키니스트도 유네스코 문화유산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것이 주2의 제목이자 내용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연달아 이런 오류가 나오면 책을 편하게 읽기 무척 어려워진다. 어떤 사실을 기술할 때마다, 그 기술의 사실충실성에 대해 의심하고 하나하나 검증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을 쓰다 보면 어떤 사실들에 대해 정리를 해야 할 때가 생긴다. 용어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그 정의를 나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확한 인용 근거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보통은 여러 차례 인용된 논문이나 이미 정전(canon)으로 자리 잡은 저서들을 활용한다. 그렇게 정형화된 검증 과정을 거친 자료를 찾지 못했을 경우, 종종 언론 기사를 인용하기도 한다. 각국 주요 언론사라 지칭되는 곳에서는 언론윤리에 부합하기 위해 '팩트체크'를 해서 기사를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위키피디아'를 그대로 베끼는 책, 논문, 기사들을 접하게 됐다. 기함할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최소한의 팩트체크마저 인터넷의 집단지성에게 미뤄버리는 이 한심한 작태에는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보다 더 경악할 일은 사실관계가 잘못된 내용을 그냥 글에 쓰는 경우다. 이건... 아욱토르(auctor)에서 파생한 작가라는 개념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작가만 탓할 수도 없다. 보통은 출판사의 잘못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고 편집자가 존재한다. 그런데 편집자의 '편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선을 넘어서, 그저 '겉멋'만 잔뜩 들어간 말장난 잔치가 될 경우에 사고는 쉽게 일어난다.
'북저널리즘'이란 용어를 전유(appropriation)하고자 한다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대별적 상징성 정도는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저널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사실충실성이다. 불편부당함은 저널리즘의 미덕이 될 순 있지만, 당파성을 가진다고 해도 안 될 건 없다. 사실을 해석하는 태도의 차이, 그리하여 드러나는 당파성은 되레 각각의 저널리즘이 담지해야 할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충실성만큼은 반복적으로 확인해야 할 저널리즘의 사명이다.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외래어표기법을 철저히 무시한 불어, 독어, 영어의 역어 사용은 혀를 차게 만든다. 전적으로 작가와 편집자의 게으름에 연원하는데, 편집자의 잘못이 훨씬 더 크다. 어문규정을 지켜서 글을 완성하는 것, 다시 말해서 교정과 교열을 거치는 것은 편집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권두에 '일러두기'라도 써넣어서 외래어표기법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를 드러내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보통 그런 변명조차 하지 않는 경우에는 외래어표기는 개판이 되곤 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서점의 형태는 크게 4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경쟁력을 잃고 생명력이 다하는 옛날 방식의 책방, 덩치를 키워서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책방, 독립출판사가 경영하는 플래그십스토어,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커뮤니티로서의 서점이 그렇다. 무엇 하나 서점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여러모로 난감하고, 이래저래 고민스럽다.
부키니스트처럼 옛날 방식의 서점에는 제대로 된 경쟁력이 존재하질 않는다.
책이란 물성을 지닌 상품은 40년 전과도 다르고, 20년 전과도 다른 물건이 되었다. 유통 방식부터 소비 양태까지 그 무엇 하나 예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책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책'은 굳이 종이에 잉크로 고착된 형태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책과 같은 내용이 뉴미디어로 제작되어 유통되기도 한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에 꽤나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보니, 부키니스트 방식의 중고서점은 사양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 17세기 이래로 수백 년간 하나의 산업으로 작용했던 부키니스트 방식의 중고서점업은 21세기에 살아남기 힘들어진 것이다. 결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타이틀을 통해 관광자원으로 박제되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부키니스트들 자체가 깨닫고 있다. 헌책이 들어 있는 책 박스는 그저 손님 몰이용 장식품이 되고, 센강변의 기념품 상점이 되는 것으로 정체를 변경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현실을 각성한 것일 테다.
스트랜드나 아거시처럼 규모화한 헌책방의 주요 수익모델은 고부가가치인 '고서'에 있을 테다. 거저 들고 오다시피 하는 헌책들에서 희귀 초판본이나 사인본 등을 걸러내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폐지로 팔아치워도 그리 손해 볼 것 없는 '찌꺼기'들을 단돈 1달러에 팔아도 된다.
상품이 될 수 있는 헌책은 그리 많지 않다. 과월호 잡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당시에 필요한 지식들을 다룰 경우에는 책의 생명력은 무척 짧다. 쉽게 말해서, 윈도98이나 한글 3.0b 또는 포토샵 4.0 활용서와 같은 책들은 책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기 어렵다. 냄비받침이나 가구수평자로는 활용될지언정, 그걸 읽고자 구매하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문학작품들마저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더 이상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classics)이 되는 작품들은 수십만 작품 중에 하나 정도다.
그렇다 보니, 헌책이 아니라 '오래된 책'이라는 새로운 물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책들은 그냥 kg당 얼마에 팔리는 폐지 신세를 면할 수가 없고, 헌책방의 생존전략 역시 규모화를 통해 '고서'를 선별해내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알라딘 중고서점은 헌책방이 아니라서 함께 묶어 이야기할 순 없다. 거긴 '신간' 취급받을 수 없는 새책을 헌책 취급하는 곳일 뿐이라서 말이다.
하우징웍스, 블루스타킹스, 게이스 더 워드와 같은 서점들은 서점의 미래에 대한 고민에는 1도 도움이 되지 않고, '서점을 활용한 시민운동의 미래'에 도움이 될 듯싶다.
미국 사회는 비정부기관(NGO)이나 비영리기관(NPO)에 의해 운영되어온 사회적 경제(Social Ecomony)는 제도화(instituionalization)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시간을 두고, 기부와 자원봉사 그리고 이를 통한 세제혜택의 선순환이 사회적 경제라는 하나의 제도를 이룩해낸 미국 사회의 독특함은 그 어느 사회도 쉽게 따라잡을 수 없다. 미국이라서 가능하고, 미국만이 가능한 그 무엇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몇몇 서점들이 지역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여전히 실패와 좌절이 더 잦은 편이지만, 그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만 할 순 없다. 발전소책방5협동조합의 쩜오책방처럼, 지역사회에서 지역민들이 '집단적'으로 지역문제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망하지 않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주고 있긴 하다.
퍼세퍼니서점이나 보니의 요리책서점과 같이, 출판사 직영의 플래그십스토어로서의 서점이나 주력사업의 소품으로써의 서점 역시 서점의 미래로 다룰 건 아니다. 비즈니스에서 '서점'이란 형태의 쇼룸 또는 '책이라는 소품'이 주는 공간디자인의 장점은 하바 요시타카라는 걸출한 북디렉터에 의해서도 검증된 바 있다.
이렇게 이래저래 고민을 하고 나니... 여러모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