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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Sep 12. 2024

어떻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다.

[북리뷰] 도노 하루카 著/김지영 譯. 파국. 시월이일. 2020.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지 못한 이 소설의 파뷸라(fabula)는 파국(破局)이란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종국(終局)을 맞이하며, 중심인물을 비롯해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단조로운 플롯은 사건의 긴장감을 일으키지도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1인칭 시점의 한계는 인물 심리 묘사에서 처참할 정도의 실패를 가져옵니다. 

 이와 같은 서사적 실패는 책을 읽으면서 붙이는 플래그의 숫자로도 드러나게 됩니다. 독자는 사건을 따라가면서 중요한 복선으로 감지되는 문장에 주목하고, 등장인물들의 뛰어난 심리묘사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 곳에 플래그를 붙여 놓고, 곱씹게 마련이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어느 곳에도 플래그가 붙질 않았습니다. 딱 한 군데, 화자의 성격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에 처음 플래그를 붙였다가, 책장을 덮으며 떼어 내고 반납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 따위 소설에 상을 준 거야?”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기어이 심사평을 찾아보았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고가와 요코, 야마다 에이미가 적극적으로 찬성해서 수상이 결정된 듯합니다. 요시다 슈이치와 시마다 마사히코, 가와카미 히로미는 유보적인 입장을 마쓰우라 히사키와 오쿠이즈미 히카리는 최종적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2020년 상반기 제163회 아쿠타가와류노스케상을 함께 수상한 늦깎이 신인인 다카야마 하네코는 반대 의견이 없었다는 점과 비교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의 ‘애정하는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제164회에서는 우사미 린의 수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제170회에서는 구단 리에의 수상에 찬성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우사미 린의 수상작을 읽고 나서 아쿠타가와상의 ‘품질’에 절망했다가, 구단 리에의 수상작을 읽고 나서 ‘신뢰’를 회복했었습니다.      


 일본의 신인문학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쿠타가와류노스케상과 나오키산주고상을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순문학에선 아쿠타가와상, 대중문학에선 나오키상이란 대중적 인식도 안착한 것으로 보이고요. 여기에 노마문예신인상 정도가 덧붙여지는 듯합니다.

 저는 다른 수상작들은 굳이 찾아 읽지 않지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번역이 되면 찾아보는 편입니다. 언어적 친연성은 부족하지만 유사성이 높고, 특히나 19세기 후반에 외국어 번역 과정에서 착종한 ‘근대적 한자어’의 공용으로 인해, 어감을 그대로 살린 번역이 다른 언어들에 비해 쉬운 편입니다. 그래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의 ‘말맛’이 좋은 문장들을 어렵잖게 즐길 수가 있습니다. 제게는 요시다 슈이치와의 만남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위 있는 상도 종종 이상한 작품에 수여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와타야 리사, 가네하라 히토미, 우사미 린과 같은 ‘어린 작가’들의 수상작을 읽어 보면 한숨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으로 읽었기 때문에 ‘일본문학’으로서의 참맛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위대한 소설’들은 언어와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읽힙니다.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언어의 제약에서 가장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말맛’보다는 어떤 이야기(fabula)를 어떻게 구성(sujet)해낼 것인가가 서사문학에선 더 중요해서입니다. 그러니 번역을 했다고 해서 ‘좋은 소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질 이유가 될 순 없겠죠. 결과론적으로 그런 수상작품이 선정된 이후에는 ‘논란’이란 말이 이어지더군요. 그렇다 보니 이제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도 ‘믿고 보는 보증수표’에서 가끔은 넋을 잃게 만드는 ‘부도수표’가 되곤 합니다. 아쉬움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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