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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Oct 05. 2021

[북리뷰]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刊, 2021. 답답하고 불편하다. 

한강의 신간소설은 출간전부터 문학동네의 치열한 마케팅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특히나 동네서점 에디션과 같은 식의 차별화 마케팅으로 숱한 동네책방들은 인스타그램 피드에 똑같은 이미지를 도배하고 있었다. 이건 거의 '믿고 읽는 한강'이나, '문학동네라면 덮어놓고 입고'의 수준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늘 좋을 수는 없다. 작가가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변하면 '초심을 잃었다' 비난하며 떠나며, 내가 변하면 '고인물의 자기 복제가 반복된다' 비난하며 떠난다. 그렇기에 오랜 기다림에 만난 신작이라도 덮어놓고 사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무지성'으로 일단 사고 보는 경우도 있다. 팬덤문화가 좀 그렇다. 

굳이 걸그룹 "카라"의 CD를 앨범이 나올 때마다 사서, 그걸 또 MP3파일로 변환해 들었던 어떤 꼰대의 경우처럼 말이다. 나중에 혹평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사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읽을 만한 것인지, 그리고 그걸 넘어서 사서 소장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해 보기 위해 읽고 리뷰를 써봤다.


1. 답답하고 불편하다.


불편한 이야기를 고민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도록,참 불편하게 글을 쓰는 소설가들이 있다.

공선옥이 그랬고, 염승숙이 그랬다.

심지어 염승숙의 소설은 세 권이나 사놓고도, 한 권도 채 읽지 못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는 서사(fabula)를 따라가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는 플롯(sujet)의 복잡한 배치는 가져가지 않았다. 미덕이다.


불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답답함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에도 해소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서사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7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엿같은 현실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답답함을 남긴다.


그런데 <작별하지 않는다>는 좀 많이 불편했다.

현재, 과거, 대과거를 너무 단절시키면서 교직하는 담론 방식도 그렇지만, 따옴표를 쓰지 않은 대화에 이탤릭 타입페이스로 교직하는 과거 발언들이 서사를 구성하는 이스투아르(histoire)의 획득에 적잖은 방해를 가져온다.

"부커상 수상 이후 5년, 한강 문학이 도달한 곳"은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보다 더 심연으로 잠긴 듯하다. 작가의 문체를 확립해 미학을 달성하기 위한 고단한 노력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2.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되돌아 본다


21세기 한국문학에서 한강에게 왕관을 씌워준 것은 2016년의 맨부커상 수상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까지만 해도 맨그룹에서 후원을 해서 상이름이 맨부커상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부커상이 됐다. 그 중에서도 해외작가의 영어번역된 소설을 대상으로 주는 부문이 부커 인터내셔널 프라이즈다.

2007년 초판이 나온 이후, 부커상을 수상하기까지는 9년의 간극이 있다. 2017년 2월 유총된 48쇄의 책날개에는 가디언의 서평 한 줄이 실려 있다. "놀라운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과 믿을 수없을 만큼 폭력적인 내용의 조합이 충격적"이라고 말이다. 한국어 문장을 아무리 읽어봐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이란 평가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번역된 영문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될 테다. 꽤나 맥이 빠진다.


연작소설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몽고반점>은 2005년 이상문학상을 차지한 단편이기도 하다.

당시에 이런 감상을 남겼더랬다.

"한강은 소설은 뭐랄까... 자기방기적 인물들의 자기파괴성이란 종국 자기방어에 기인하며, 그것은 온전한 자기를 재구성하며 상황을 합리화한다는, 그래서 고진의 지적처럼 고백은 또 하나의 왜곡된 권력의지로 지배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곱씹어 볼 수 있게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다."

이번 소설에서도 인물들에게서 그와 같은 경향을 찾을 수가 있어서, 못내 답답했다.


<채식주의자>는 2004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에, <몽고반점>은 2004년 가을호 "문학과 사회"에, <나무불꽃>은 2005년 겨울호 "문학 판"에 발표됐었다.

그렇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채식주의자>의 문학적 성과에서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부커상을 받았으니 그 이름값을 해야 하는 작가"로 자리매김된 이후로의 중압감 5년이 빚어낸 작품이라고 봐야 할 듯싶다.



3. 여전히 아프다


4.3폭동이 4.3사건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었던 건, 2000년"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출간된 것이 1999년이었고, 그 책을 읽은 때가 2002년이었다.

반세기가 넘어서야 진실이 민낯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꽤나 경악했었다.

1987년 광주의 참혹한 현실을 사진으로 접했던 때와 거의 비슷한 충격이었다.

타임지에서나 보던 이란/이라크전의 참상과 도록으로만 봤던 태평양전쟁의 참상이 우리나라에서 내가 태어난 이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어린 나에겐 적잖은 공포로 다가왔었다.

학살의 기억은 세대를 통해 유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답답함은 극에 달했었다.

한강의 소설은 그 아픔과 답답함을 또 다시 되살려냈다.


4. 제주방언의 수록, 언제나 옳다.


현대 한국문학에서 서사문학이 가져갈 수 있는 미덕 중에 하나는 방언의 문자적 고착이 아닐까 싶다.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이 한강의 글을 읽으면서 시원해졌다. 역시 지천명을 지난 소설가의 관록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무릎을 치며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지 않게, 이스투아르 획득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의 제주방언을 사용하는 적당한 배려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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