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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Sep 14. 2024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북리뷰] 다카세 준코.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문학동네. 2023

 최근 구단 리에의 『도쿄도 동정탑』을 시작으로 네 권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 보니,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참 웃기는 일이죠. 

 별 시답잖은 고민이라며 물릴 수도 없었는데요, ‘읽었으니 리뷰를 써야 한다’는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일기장에 썼던 것처럼, “소설을 읽었다. 참 재미있었다. 끝.”이라 할 순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직업 비평가도 아닌데, ‘각 잡고’ 작품론을 고민하는 것도 과할 테니, 그저 적당한 수준에서 취한 것을 정리하는 선으로 타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제야 ‘드라마나 영화를 보듯’ 서사문학인 소설을 즐겨왔던 방식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서사물은 이야기(story 또는 historie 아니면 fabula)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좇아 기승전결의 변화를 보여주는데요, 그 변화에 몰입(flow)해서 즐거움을 찾는 게 기본적인 목적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저 몰입해서 읽었고, 그래서 재미있는 경험이 되었다면 그만입니다. ‘참 재미있었는데, 이러이러해서 그랬다’ 정도면 되겠다 싶습니다.    

      

 몰입의 개념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견해일 듯합니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에 대해 쓴 논문이나 책에선 어김없이 칙센트미하이를 인용하고 있어, 아직 읽지도 않은 그의 책 내용을 어슴푸레 알고 있을 정도니까요. 유희와 놀이에서 쉽게 발현하는 몰입을 칙센트미하이는 행복과 창조성의 원천과 특성으로 재해석했고, “인간은 재미를 위해서 자기 목적적 활동을 하고 이 활동은 자기 목적적 경험을 낳는다. 이 활동과 경험을 통해 자기 목적적 인격, 몰입하는 사람, 행복하고 창조적 인간이 형성된다”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소설을 포함한 ‘서사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특히 저는 ‘재미’를 위해서 텍스트에 몰입하고, 그 몰입으로 행복해집니다. 몰입의 과정은 우선 핍진한 배경 속에서 치밀한 인물 묘사를 통해 사건에 집중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핍진성(逼眞性)으로 번역하는 verisimilitude이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텍스트가 스스로 정립하거나 그 텍스트가 장르 안에 존재하는 현실에 대해서 얼마나 진실한가”는 몰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인물이 존재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핍진성이 떨어지는 인물 묘사는 몰입을 방해하고, ‘급발진’ 하는 사건처럼 그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의존하는 구성(sujet) 역시 자꾸 딴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도노 하루카의 『파국』이 그러해서, ‘어떻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혹평을 하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소설은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었고, 그리하여 행복한 독서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면적인 인물들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종국에는 무슨 사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충적인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어서,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상황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숨이 턱 막히는 주제를 끔찍한 파국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고 그래서 다시 한번 침착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결말로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근본 문제에 다시 주목하면서, 마지막 파문을 그려내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내밀한 사정을 모두 풀어냈으니, 이제 이 주제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건 독자인 당신의 몫이다라고 선언하듯 말입니다. 짧은 소설에서 지나치리만큼 탄탄하게 이야기를 짜냈기에, 어렵잖게 몰입해서 재미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은 ‘재구축’입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었는데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제각각입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순 없습니다. 적당히 정보를 제공해 주면, 독자들이 그 빈틈을 알아서 채워야 합니다. 수용미학(Rezeptionsästhetik)으로 유명한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의 견해를 빌려오자면. "생산미학과 표현미학의 폐쇄된 순환 속에서 문학적 사실(literarische Kaktum)을 파악"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과정은 "경험의 맥락(Erfarungskontext) 속에서 동시적으로 읽혀질 수 있게 되는 사전적인 지식"이 작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독자반응이론가인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를 인용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분명히 사소한 장면들의 쓰여 있지 않은 모습들이나 “우여곡절”(turns and twists) 후에 말하여지지 않은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활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이 제시하는 많은 윤곽들 속에서 음영을 드리우게 한다. 그리하여 이 모두는 그들 자신의 실재를 드러내 놓는다. 하지만 독자의 상상력이 이들 윤곽들에 활기를 부여함에 따라, 그들은 이에 대응하여 텍스트의 쓰여진 부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동적 과정이 시작되고, 쓰여진 텍스트는 쓰여져 있지 않은 암시들이 너무 희미하고 몽롱해지지 않도록 이들에 어떤 한계를 그어 놓는다. 
- 볼프강 이저. <독서과정: 현상학적 접근>. 『현대문학비평론』. 한신문화사. 1994.


 일단 이 소설에서는 니타니를 중심으로 3인칭으로 서술하거나, 오시오를 중심으로 1인칭으로 서술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니타니나 오시오의 내면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갈등축을 이루는 중요 인물 아시카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시카와란 인물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각자 ‘해석’해야만 합니다. 그 해석으로 인해, 소설의 이야기(fabula)는 작가를 떠나 독자 한 사람에 의해 축조되는 새로운 세계로 편입됩니다. 작가는 의도하지도 않았고, 염두에 둔 적도 없었던 아주 새로운 세계가 재구축되는 겁니다.

  물론 독자반응비평의 차원에서는 좀 다른 견해가 가능합니다. 스탠리 피시(Stanley Fish)에 따르면, "해석이 중심을 구성하며, 그말은 곧 그 자체의 한계와 영역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이 다루는 영역은 그 자체의 일련의 내부적 규칙과 규정, 그리고 일련의 규정된 활동이 갖추어져서 완전한 것이 된다"고 선언하며,  "일련의 해석적 가정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라고 부연합니다. 이는 야우스의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의 객관화"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예로 경향신문 허진무 기자의 북리뷰를 보면 그렇습니다.

“아시카와는 겉으론 아둔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속은 타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흑막이라고 의심되는 장면들이 많다. 그는 동료들의 동정과 배려로 회사 내에서 입지를 단단하게 구축한다. 아시카와의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작품에 입체적인 매력을 더한다.”

 아시카와는 영악한 인물도 못되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기적인 인물도 못됩니다. 그저 타인의 호의가 계속될 수 있게끔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이를 테면, “일부러 후지 씨가 보는 앞에서 한 번 더 맛을 확인함으로써 허락 없이 마신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인을 보”낼 줄은 알지만, “배운다고요? 저희 누나한테서?”라며 동생의 멸시가 느껴질 정도의 반문을 이끌어낼 정도입니다. 오죽했으면 반려견까지도 아래 서열로 볼까요. 그런데 작가에 의해 묘사된 아시카와의 정보 이상의 모습이 허진무 기자에겐 보인 모양입니다. ‘버려진 간식은 아시카와의 자작극이닷!’이라며 소리칠지도 모르겠네요. 저 역시도 ‘의외로 범인은 하라다일지도 몰랏!’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라다는 “누굴 탓하는 태도 대신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며 상대를 배려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정곡을 찌르는 사람”이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서요.     

 이번에는 김민정 작가의 경향신문 기고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시카와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종종 케이크를 구워와 부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아시카와만의 방식이다. 항상 웃음 띤 얼굴로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가끔 케이크를 구워오는 사원은 출세를 할 수는 없겠지만 부서에 한 명쯤 있으면 딱 좋은 사람이며, 아시카와는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하지만 니타니는 아시카와가 만들어온 복숭아타르트를 보면서 “평일 밤에 이런 걸 만들 시간이 있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부터 든다”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동료들은 “일곱 시 넘어 퇴근하는 날이 이삼일 이어지면 다음날 몸이 안 좋다고 출근하지 않는 탓에, 아예 못 나오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다들 여섯 시가 넘으면 ’슬슬 들어가는 게 어때 ‘하며 그녀에게 퇴근을 종용“합니다. 그런데 일찍 집에 가서는 몇 시간은 걸릴 베이킹 작업을 해오는 걸 마냥 '성실'로 납득하긴 어렵습니다. ’한 명쯤 있으면 딱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되레 빌런으로 보일 겁니다. 그래서 버려진 간식으로 니타니는 “우리 말고도 넌더리 내는 사람이 또 있다”라고 단호하게 추리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허진무 기자나 김민정 작가의 감상이 오독의 결과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진술되지 않은 정보를 독자들이 나름대로 채워서 추론한 결과이기에, 독자 자신의 몫일 뿐이죠. 그래서 소설 읽기가 즐거운 일이다 싶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다그쳐 묻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서사의 명시적 흐름을 봤을 때는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거기에 제대로 힘을 쓰지 않고 ‘저란 말’이나 ‘그런 말’로 시선이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평적 관습에 기댄 표현을 쓰자면, ‘주제 의식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작가조차도 주제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 서사 안에서 길을 잃게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저런 말’이나 ‘그런 말’은 결국 ‘이런 말’을 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하는데, 주객전도가 이루어지는 거죠. 때론 정제된 주제 의식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화려한 문체나 독창적인 구성으로 서사의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비뚤어진 욕망이 발현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도 주객전도가 일어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럴 염려는 없었습니다. 주제의식이 명확하게 전달됩니다. 우리의 삶은 일상적으로 공정하지 않고, 그 불공정은 해소하기 불가능한 부조리란 점입니다. 아쿠타가와상은 보통 문고판(A6) 150페이지 분량의 중편인지라, 그 짧지도 않지만 길지도 않은 분량 안에 탄탄한 기승전결을 욱여넣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어려운 일을 참 잘 해냈습니다. 심지어 피해자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새로운 가해자가 되는 부조리의 연쇄는 당최 해결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못 본 척 눈감고 살 순 없는 노릇이란 주제 의식을 오롯이 드러냅니다. 그러니 책을 읽고 나서도 머리 아프게 자꾸 고민하게 됩니다. 책장을 덮고도 몰입이 계속된다는 거죠. 

  아시카와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한 모양이라 지금도 목소리 큰 남자를 대하는 게 좀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니타니는 “미덥지 못하고 연약해 보이는 상냥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선이 가늘고 작은 체구에 웃는 낯인 여자 중에서도 그 연약함 속에 나는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식의 뻔뻔함이 보이는 사람에게 묘하게 더 끌렸”습니다. 그래서 그 둘의 관계가 시작된 겁니다. 하지만 니타니는 몹시나 모순적인 인간입니다. “그저 자기 자신이 싫어진 거겠지만, 당시에는 뭘 그렇게 모범생인 척하며 일일이 책을 다 사느냐는 둥 생트집만 잡는” 사람이라서, 이번에는 “나는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생활방식을 선택하는 게 싫어”라며 또 다른 ‘생트집’을 잡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니타니는 은연중에 오시오에게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오시오 역시 착실한 사람입니다. 치어리딩을 좋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하려던 사람입니다. 그렇다 보니 “일을 못하는 사람이, 동료에게 일을 떠넘기는 사람이, 어떻게 피해자 행세를 할 수 있나”라며 자신이 악역을 맡아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날 뿐입니다. 그런 오시오에게 아시카와는 “대단하다. 나는 치마 입고는 그렇게 못해”라며 천연덕스레 말하고 맙니다. 독자들 입장에서도 꽤나 어이없고 얄밉게 느껴질 정도죠. “용납할 수 없어서 아시카와 씨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시카와 씨를 싫어하면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용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사람은 약하다. 약해서,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싫다.”라고 생각하던 오시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쉽게 수긍하긴 어려운 발언이죠.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사카와에게 나쁜 짓을 하자고 모의했던 니타니와 오시오가 아닌 제3의 인물이 간식을 버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오시오가 내몰립니다. 원죄(冤罪)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결국 니타니의 범행이 결행되지만, 되레 오시오가 범인으로 확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오시오 씨가 사무실에서 나가자 다들 말없이, 하지만 일하던 손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습니다. 결국 오시오는 회사를 떠나기로 합니다. 아사카와를 싫어했지만, 뭐 하나 해코지한 게 없는 오시오가 다른 사람들의 악의를 짊어지고 퇴장하는 부조리가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오시오의 마지막 항변이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쏟아붓고 도망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두통도 사실입니다. 편두통을 달고 살아서 자주 아픕니다. 평소에는 참고 일하고 회식도 가곤 했지만, 관두는 마당에 더 이상 무리할 필요 없을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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