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심리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건 2023년 1월이었던 듯합니다. 완독, 그러니까 책을 찬찬히 살펴보며 주요 내용들을 타이핑하고 리뷰까지 작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제 나름의 독서 경험을 완료한 것이 아니었던 터라 언젠가 다시 읽겠노라 다짐을 했던 책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는, 트롤리 실험에 대한 이견으로 다시 한번 이 책을 펼쳐보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이때도 완독에 이르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존 히빙 등의 책,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때문에 꼼꼼히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책의 내용에 당최 동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증거를 찾고 싶어서 이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만, 이 책은 좀 더 나아가서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저자는 존 히빙 등이 확언하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확언하면서, 정치 성향의 유전을 말합니다. 저의 ‘확증 편향’이 보기 좋게 좌절됐고, 저의 이런 태도를 저자는 4장을 통해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어서, 적잖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 히빙 등의 견해나 조너선 하이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 건 아닙니다. 두 책 모두에서 인용되었던 조지프 헨릭의 진류인류학적 견해에 비추어봐도, 유전되는 일정 부분의 ‘타고난 성향’만으로 정치적 성향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7~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근거한 합리주의 철학의 관념론에 불과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데이비드 웬그로가 『모든 것의 새벽』에서 살펴본 것과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기술한 것처럼, 신석기시대부터 인류는 관념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으며 질서를 유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자 역시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해 같은 맥락의 설명을 가져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됐습니다. 아무리 대중서라고는 해도,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벽돌책입니다. 이걸 다 읽었는데도, 무엇 하나 속 시원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되레 도서관앱의 관심도서 목록만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저자가 머리말을 통해 밝힌 집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6쪽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이 책은 그 까닭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다.
그에 이어서 “정치와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그 모든 과열·분노·편 가르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그 자리를 경외심·놀라움·호기심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라고도 밝혔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 나면, 그 목표는 실현 불가능할 것임도 알게 된다는 게 함정입니다.
이는 책 제목에서 쉽게 드러납니다. 저자가 ‘바른 마음(Righteous Mind)’으로 제목을 정한 이유는 “인간 본성은 본래 도덕적이기도 하지만, 도덕적인 체하고 비판과 판단도 잘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그 증례라고 할 수 있겠죠.
19쪽
바름의 성향과 판단하는 성향 사이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현대 들어 생겨난 ‘righteous’의 정의, 이를테면 “정의, 도덕성, 혹은 공평성 문제와 관련해 격분을 느끼는”과 같은 대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self-righteous(독선적인)’의 정의, 즉 “자기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특히 다른 이의 행동이나 믿음과 대조하여), 도덕적으로 편협하고 관용이 없는 것”에서도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바름에 대한 강박(이는 불가피하게 독선으로 이어진다)이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증상임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머리말은 마태복음 7장 3절에서 5절의 성경 구절로 마무리됩니다.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저자는 ‘바른 마음’에 크게 세 가지 원칙이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비유로는 “둘로 나뉜 마음은 코끼리 위에 기수가 올라탄 모습이고, 기수의 역할은 코끼리의 시중을 드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비유로는 “바른 마음은 마치 여섯 가지 미각 수용체를 지닌 혀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셋째,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비유는 “인간 본성은 90퍼센트는 침팬지, 나머지 10퍼센트는 벌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장 피아제 Jean Piaget의 주장을 가져와서, 아이들이 도덕성을 이해하는 것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어른에게 배우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놀며 도덕성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세워나간다”라고 봤습니다. 더 나아가 게리 마커스 Gary Marcus의 견해를 원용하며, “인간의 뇌는 한 권의 책과 같고, 엄마의 배 속에 있는 동안 유전자가 그 초고를 쓴다는 것”으로, “태어날 당시 책에는 어느 章도 완성되어 있지 않으며, 일부는 아예 개요만 대략 정해져 있어서 아동기를 거치며 그 내용을 채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빈 여백은 아니어서 사회가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써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도덕성은 아이들이 피해의 개념을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세워나가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고, “문화를 통한 학습이나 문화적인 유도가 합리주의 이론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는 직감은 때로 도덕적 추론을 진행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하며, 도덕적 추론은 때로 사후 조작과 다름없는 양상을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코끼리와 기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통제된 인지 과정인 기수가 자동적 인지 과정인 코끼리의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이때 기수는 코끼리의 시중을 들어주도록 진화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회적 직관주의자 모델”이라는 새로운 인식론 모델을 제공합니다. 칸트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도덕 인식론에서는 ‘이성적 숙고 rational deliberation의 결과’를 도덕적 판단이라고 보았습니다만, 저자는 코끼리의 직관에 의해 빠르게 도덕적 판단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 기수의 이성적 숙고에 의해 사후 정당화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똥고집이 쉽게 나타난다고도 봤습니다.
141쪽
우리는 자기가 믿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증거를 찾아 나서는 것에 서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칼같이 찾아내듯이, 우리 믿음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찾아준다. 하지만 상대방과의 논의가 적대적으로 진행되어서는 누구든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희박하다. 코끼리는 반대자다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몸을 틀어버리고, 그러면 기수가 정신없이 달려들어 반대자의 비난을 반박할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강박적일 정도로 염려”합니다.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뿐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의식적 추론은 우리의 모든 입장을 자동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면서, 거짓말을 태연히 하게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잘못이 없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이때 도덕이나 정치 문제처럼 개인보다 집단을 염두에 두고 판단을 내릴 때에는 “우리가 팀을 지지하고 팀에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 추론 능력을 활용한다”고도 봤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터 웨이슨이 이름 지은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이 발생합니다.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그것을 확증하는 식으로 새로운 증거를 찾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의 믿음이 도마에 오르면, 그 믿음을 내 것처럼 소중히 여겨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 톰 길로비치 Tom Gilovich에 따르면, 하고 싶은 일에는 ‘내가 이것을 믿어도 될까(can)?’라고 물은 후에 믿음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 나선다고 합니다. 단 하나의 허위 증거라도 발견하면, 덮어놓고 믿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내가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must)?’라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반대할 만한 이유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우리는 그 주장을 무시해 버린다고 합니다.
이쯤에서 존 히빙 등의 책과 비슷한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신체 상태가 때로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인데요, 종첸보의 맥베스 효과 Macbeth Effect를 활용합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신체적인 정화 cleanliness를 통해 심리적 죄책감을 줄이려는 심리적 정화 욕구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역의 과정도 가능하고요. 이로써 신체적, 물리적 변화가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를 세웁니다.
두 번째 원칙을 설명하는 “바른 마음은 마치 여섯 가지 미각 수용체를 지닌 혀와 같다”는 비유는 여섯 가지의 도덕성 기반을 일컫는 겁니다. 저자는 “모듈성 개념을 통해 선천적 수용체에 대한 사고를 전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초기의 다양한 인식, 그리고 그것이 문화 속에서 다양하게 발전하는 양상도 살펴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그 6가지 도덕성 기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① 배려/피해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무력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필요의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또 이 기반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잔혹함을 경멸하는 경향을 보이고, 나아가 고통받는 이들을 돌봐주려는 마음을 갖는다.
② 공평성/부정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협동으로 보상을 얻되 착취는 당하지 말아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누가 협동과 호혜적 이타주의에 훌륭한 파트너다 싶으면 그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우리가 사기꾼이나 부정행위자와 관계를 끊거나 그에게 벌을 주고 싶어 하는 것도 이 기반 때문이다.
③ 충성심/배신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연합을 구성하고 유지해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누가 훌륭한 팀플레이어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이 기반 대문에 우리는 그럼 사람에게는 신뢰와 보상을 주고 싶어 하고, 반대로 나 혹은 우리 집단을 배반하는 사람에게는 위해, 추방, 심지어 살인으로 응징하고 싶어 한다.
④ 권위/전복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사회적 위계 서열 내에서 인간관계를 잘 구축하여 모종의 이득을 거두어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서열이나 지위의 표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며, 타인이 자신의 주어진 지위에 맞게 잘 행동하고 있는지도 민감하게 살핀다.
⑤ 고귀함/추함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애초에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으나, 병원체와 기생충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더 광범한 도전 과제 역시 후일 이 기반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귀함/추함 기반에는 행동 면역 체계도 포함되는바, 우리는 이를 통해 다양한 상징적 사물과 위협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사람들은 집단을 하나로 뭉쳐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비합리적일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쏟아붓는데, 그런 경향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기반 때문이다.
⑥ 자유/압제 기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배의 표시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의분을 느낀다. 불한당과 독재자에게 저항하거나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 같이 뭉쳐야 한다는 욕구도 여기에서부터 생겨난다. 이 기반을 잘 알면 자유주의자와 일부 보수주의자가 왜 “나를 짓밟지 마라” 식의 반정부 감정을 가지는지는 물론, 좌파의 평등주의와 반권위주의도 이해할 수 있다.
550쪽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이는 상대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족과 같은 도덕 공동체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신성한 가치를 빙 둘러싸고 다 같이 힘을 합쳐 왜 우리가 백번 옳고 저들은 백번 그른지 사후 논변을 지어낸다. 그러면서 상대방은 눈이 멀어 진실·합리성·과학·상식을 못 본다고 여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신성한 대상을 이야기하는 순간 눈이 멀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따라서 상대편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쪽에서 신성시하는 것을 따라가 보면 된다.
저자는 “정치의 어느 한쪽에 일단 발을 들이고 나면, 사람들은 그 안의 도덕 매트릭스에 갇혀 거기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이 품은 장대한 서사가 옳다고 확신하며, 따라서 그 매트릭스 바깥에서 논쟁을 벌여서는 그들이 틀렸다고 이해시키기가 무척 힘들어진다”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괄호 안에 넣었습디만, 제가 봤을 때는 이게 결론이라고 봅니다. “아마 우린 안 될 거야”가 답이란 거죠.
“인간 본성은 90퍼센트는 침팬지, 나머지 10퍼센트는 벌과 같다”는 비유는 장기적 협력이 되지 않는 침팬지와 그게 가능한 벌을 가지고 인간을 설명한 겁니다. 대체로 자기밖에 모르는 Homo economicus가 이기적인 행동을 하기 마련이지만, 어느 순간 군집 스위치 hive swich가 켜지면, 이타적인 행동도 가능한 Homo duplex로 바뀐다는 겁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의 이익을 초월하여, 자아를 잊고 자신보다 커다란 무엇에 빠져드는 능력이 있다”라고 합니다. “신성한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 큰 희열을 맛보며”, 그 안에서 개체는 ‘전체를 이루는 일부’가 된다고 봤습니다.
그 군집 스위치를 켜는 방법으로는 흔히 세 가지, 즉 자연에 대한 경외심, 뒤르켐주의적 약물, 레이브 파티(축제 또는 성인식)가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종교가 발생하고, 종교는 도덕관념에 몹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봤습니다. 종교인의 훌륭한 자질에 있어 종교적 생활이나 믿음은 거의 중요하지 않고, 동료 종교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단단히 얽혀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도덕 매트릭스 안에서 맺어지고 이루어지는 우정과 집단 활동이 이타심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소속감”이라 설파합니다.
물론 종교적 신념은 위험성도 내포합니다. “어떤 것이든 사람들을 하나의 도덕 매트릭스로 엮을 수 있기만 하면, 그리하여 내부 집단은 미화하고 동시에 타 집단은 악으로 몰 수 있기만 하면, 거기에서 도덕을 내세운 살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종교는 잔혹 행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보다 잔혹 행위의 방조자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다만, 저자는 “자신을 넘어선 무엇에 관심을 갖는 것, 나아가 다른 이들과 무리 지어 그 주위에 몰려드는 것, 이는 다른 것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비범한 능력”으로, “서로가 한 팀으로 뭉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업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봤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라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