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로또 사야 되는데."
한동안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노후 대비를 위한 재테크에 관심이 생겨, 주식을 공부하고 30대가 많이 가입한다는 금융상품들을 알아보면서부터였다. 앞으로 20년을 더 일한다고 가정해도 정년퇴직 이후 생활비를 저축하려면 빠듯했다. 나이 들면 이곳저곳 아프다고 하니 병원비로 쓸 돈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부모님이 그때까지 사신다면 간병비와 치료비로 사용할 돈도 있어야 했다. 엄마 명의의 집이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동생과 함께 노후 얘기를 하다 보면 끝에 가서는 둘 다 막막해서 서로를 보며 푸념하곤 했다.
"아, 로또 사야 되는데."
로또 1등 당첨금 실수령액이 15억 정도라고 한다. 이걸 전부 노후자금으로 묶어둔다고 했을 때, 정년퇴직 이후 3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360개월이므로 대략 월 400만 원을 생활비로 쓸 수 있다. 뼈 빠지게 벌어도 400만 원은 못 받는 나에게는 아마 꿈에서나 만질 법한 돈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소시민은 다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들 그렇게 열심히 로또를 긁고 주식을 사 모으나 보다. 15억만 있으면 돈 때문에 못하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마음 편하게, 늙어서 고생할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실제로 일확천금을 손에 쥔 사람들 이야기가 적잖이 들려온다. 동생 친구의 친구가 25억에 당첨되어 그날로 퇴사했다는 이야기, 회사 동료 셋이 돈 모아 로또를 사고 1등에 당첨되자 나눠 가졌다는 이야기, 심심풀이로 하던 비트코인이 '대박'을 쳐서 건물주가 되었다는 이야기, 별생각 없이 만들어두고 잊어버렸던 주식계좌를 몇 년 뒤에 열어 보니 수십 배 올랐더라는 이야기 등등. 일확천금의 꿈이 그저 꿈만은 아닌 것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있어서 더욱 로또와 주식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내 동생도 매주 낙첨하면서도 당첨확률이 높다는 목요일이면 꼭 로또를 산다. 당첨되면 일단 집부터 옮길 거라면서, 돈 잘 굴려서 자산이 어느 정도 모이면 지금 직장 때려치우고 소소하게 아르바이트나 하고 살겠다면서.
들어보면 다들 꿈이 소박하다. 그럴듯한 내 집 한 채 마련하고, 평소 생각하던 아이템을 개발해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에 취미활동이나 봉사활동을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놀고먹기를 바라는 사람은 최소한 내 주변에는 없다. 다들 로또에 당첨돼도 일은 계속할 거라고 입을 모은다. 나도 로또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을 바꾸는 것이다. 글밥 먹고살기 힘들다는 한국에서 글밥 먹고사는 것이 꿈이어서 수입이 없을 때를 대비할 자산이 필요하다. 그러자니 내 능력으로는 요원할 것 같아 로또니 주식이니 하는 데 마음이 끌린 거다. 내 주변 사람들도 나도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필수인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다른 꿈을 꾼 셈이다. 젊어 고생은 해도 늙어서는 편히 살고 싶다는 소망을 포함해, 대한민국 서민들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일확천금의 꿈을 꾼다.
반대로 말하면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행복하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사실, 한국인들이 성실하기로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지 않는가 말이다. 하다못해 요행을 얻을래도 부지런해야 한다. 매주 잊지 않고 로또 사서 당첨 확인하는 것도 노력이고, 주식투자 공부를 하는 데에도 시간과 머리를 써야 한다. 비트코인도 될만한 걸 해야지 아무거나 사서는 본전도 못 건지기 십상이다. 천금을 벌면 어디다 어떻게 쓸지부터 계획하는 것도 예전에는 허무맹랑한 공상이라고 코웃음 쳤는데, 요즘은 성실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왜 매사에 열심인데도 좀처럼 행복하지 못할까? 아니, 행복이 왜 노력해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을까?
행복에 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일단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어야 한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하리라 본다. 앞날 걱정하면서 행복하기는 힘들 테니 말이다. 그런데, 미래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지 않나? 내일 날씨도 알아맞히기 힘든 인간이 수십 년 뒤 삶을 예측하기란 더 어렵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하다면 뒤집어 말해 불확실함에 걸 기대와 에너지를 현재로 돌려도 된다는 의미다. 보험 하나를 들더라도 꼼꼼히 따져 드는데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 못하는 미래에 현재 가진 자원을 대부분 투입하는 것은 주식투자 식으로 말하면 수익성 떨어지는 일이다. 시드머니를 마련하려고 주식에 투자하건, 집 장만하려고 로또를 하건, 그것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불행하고 힘들지 않은지, 그 소망을 이뤘을 때 진실로 행복할지 꼼꼼히 따져 보고 실행에 옮길 일이다.
내게 있어 로또는 행복의 두 가지 요소에 맞지 않는다. 첫째로 로또 사는 데 들이는 돈과 시간, 낙첨에 대한 실망을 극복할 정신력으로 다른 일을 하고 싶으며, 둘째로 만일 1등에 당첨돼서 15억을 번다 한들 현재 행복을 느끼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대답은 '아니오'다. 물론 적게 벌어도 먹고살 수 있다는 점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 들여 책을 읽고 글을 쓸 동력을 잃을 것 같아 두렵다. 독서와 글쓰기는 인생, 세상, 삶을 향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진정한 앎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답을 찾지 못할 것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것은 내가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돈으로 물질 욕구를 메우고 나면 더는 궁금한 것, 필요한 것, 아쉬운 것이 없을까 봐 못하겠다. 돈 좋은 줄을 남들 못지않게 잘 알기 때문에 더 그렇다.
같은 이유로 주식공부도 그만뒀다. 극도로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상 주가가 올랐다 떨어졌다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 (비트코인은 도무지 수익 내는 메커니즘이 이해되지 않아 포기했다.) 대신 지금 해서 즐거운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거저 얻는 행복은 없다지만 나는 좋아하는 활동에서 얻는 행복이 돈보다 소중하다. 노후 준비는, 요즘은 작가 되기 좋은 세상이니까 꾸준히 읽고 쓰다 보면 길이 열리지 않겠나, 생각한다. 작가는 사실상 정년이 없는 직업이니 이쪽에 투자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따금 건너 건너 아는 누군가가 로또 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슬그머니 '로또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일확천금에의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뭐, 나도 사람인데 어쩌랴. 퇴근길에 로또 사야지 해놓고 막상 퇴근하면 잊어버리는, 미련한 것도 같고 현명한 것도 같은 성격대로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