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미스즈,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나는 좋아하는 소설가는 있어도 좋아하는 시인은 없었다. 아마 시를 소설에 비해 덜 읽은 탓일 것이다. 어릴 때는 동시를 곧잘 읽었던 것 같은데 나이 먹으면서 왜인지 점점 시를 멀리했다. 해석과 암기 위주 공교육에 책임을 돌리기에는 짧지 않은 독서 인생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았다. 되짚어보면 학창 시절에 배운 시 중에 좋은 시가 참 많았는데 말이다. 나도 나를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으니 그냥 시보다 소설이 더 좋았나 보다 하고 넘겼다. 인터넷서점에 추천도서로 시집이 뜨거나 종종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시집 코너를 지나갈 때 한 번씩 눈길은 줬지만 여전히 시집을 사서 읽는 데는 인색했다.
이런 내게 드디어 좋아하는 시인이 생긴 것은 올해 초, 류시화가 엮은 <시로 납치하다>를 읽고 난 뒤였다. 그 책에 실린 시 한 편 한 편이 모두 명작인데 특히 눈길을 끈 시가 있었다. 가네코 미스즈라는 이름의, 생소하지만 어딘지 친근한 느낌을 주는 시인이 쓴 '나와 작은 새와 방울'이었다.
내가 두 팔을 펼쳐도
하늘은 조금도 날 수 없지만
날 수 있는 작은 새는 나처럼
땅 위를 빨리 달리지 못해.
내가 몸을 흔들어도
고운 소리는 낼 수 없지만
저 울리는 방울은 나처럼
많은 노래를 알지 못해.
방울과 작은 새 그리고 나
모두 다르지만, 모두 좋다.
서로 다른 존재들을 끌어안는 넓은 가슴. 아마도 그 가슴은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맑은 물과 같았을 것이다. 가네코 미스즈는 어머니의 서점에서 일하는 틈틈이 수첩에 시를 썼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의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도 가네코 미스즈는 자연 속을 뛰놀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갖고, 약한 미물들에게 연민을 품으며, 자기 발 밑에 있는 풀과 돌과 벌레 입장에 서 보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 '풍어'라는 시에 가네코 미스즈의 그런 품성이 잘 드러나 있다.
아침놀 붉은 놀
풍어다
참정어리
풍어다.
항구는 축제로
들떠 있지만
바닷속에서는
몇만 마리
정어리의 장례식
열리고 있겠지.
이 시는 사후에 잊혀가던 가네코 미스즈를 다시 태어나게 해 준 작품이다. 어릴 적 동시집에서 '풍어'를 읽은 동시작가가 가네코 미스즈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그의 남동생으로부터 512편의 시가 쓰인 수첩을 입수, 세 권짜리 전집으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생전에 발표한 시 60편을 묶은 책이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다. 한국에서는 선집이 먼저 출간되었고, 이후 두 권짜리 전집으로 그의 작품이 모두 국내에 소개되었다. 시가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시도 꼭 읽어보고 싶은데 우리나라에 없으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을 안고 검색했을 때 전집이 떡하니 나와서 얼마나 기뻤던지! 그 자리에서 세 권 모두 주문해, 꽃처럼 예쁜 시들을 아껴 가며 조금씩 읽었다.
꽃과 새,
놀고 있었다.
그림책 속에서.
꽃과 새,
줄서 있었다.
장례식 앞에.
누구하고
노나.
꽃집의 꽃은.
누구하고
노나.
새가게의 새는.
- 가네코 미스즈 전집 2 <억새와 해님> 中 '꽃과 새'
흔한 단어들을 엮어서 가슴 찡하도록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가네코 미스즈는 조금도 난해하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어린이처럼 솔직하고 직선적인 화법을 구사해 가뭄 날 흙길처럼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그런 작품들을 읽고 있노라면 고개 끄덕이며 '맞아, 맞아. 나도 어릴 적에 그랬어.'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어른은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 감성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데에는 가네코 미스즈를 따를 시인이 없으리라고 감히 단정해 본다.
누구인지
모르는 손님,
우리 집 가는 길 묻지 않을까?
토라져서 집을 빠져나왔거든.
가을 저물녘, 네거리에서.
포르르포르르 지는 버들,
깜빡깜빡 켜지는 등불.
누구인지
모르는 나그네,
우리 집 가는 길 묻지 않을까?
- 가네코 미스즈 전집 2 <억새와 해님> 中 '나그네'
아마도 열 살 미만 어린이일 화자가 귀엽고 안쓰러워서 꼬옥 안아주고 싶다. 이유 없이 엄마가 밉고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만 같아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나를 따뜻이 끌어안고서 배고프지? 가서 저녁 먹자, 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린이는 한 티스푼 정도의 위로면 되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에 밥 한 그릇 말아먹고서 하룻밤 자고 나면 토라졌다는 것도 잊고 다시 신나게 뛰어놀 텐데. 어릴 적의 나는 그렇게 단순해서 하루하루가 늘 즐거웠다. 구슬치기 하다가 구슬을 깨뜨려 속상해도 하루 이틀 지나면 모래성 쌓기 놀이에 정신이 팔렸다. 햇볕에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살이 다 까진 뒤에 감자를 갈아 붙이며 따가움에 눈물짓던 그때의 나를 가네코 미스즈가 되불러온다. 그는 스물여섯 해의 짧은 삶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들은 세세토록 남아 어린이들에게 낭송될 것이다. '하늘빛 고운 눈망울'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냥 둡시다.
아침 뜨락 한구석에서
꽃님이 글썽글썽 눈물 흘린 일.
혹시라도 소문이 돌아
벌님 귀에 들어간다면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꿀을 돌려주러 가겠지요.
- 가네코 미스즈 선집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中 '이슬'
가네코 미스즈 작품이 어린 시절 향수만 자극한 게 아니다. 그 덕분에 시 읽기에 흥미가 생겨서 시집을 한 달에 한 권은 꼭 읽는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반드시 시집 코너에 가서 이 책 저 책 들춰 보고 마음에 들면 사서 나온다. 특별히 눈에 띄는 시는 다시 읽고 싶을 때 언제든 떠올릴 수 있도록 외워둔다. 내게 가네코 미스즈를 알게 해 준 시인 류시화는 "삶은 불가사의한 바다이고, 시는 그 비밀을 해독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줍는 단서들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나는 가네코 미스즈의 시를 읽으며 아이처럼 투명한 가슴으로 세상을 껴안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조금 느리더라도 이 걸음이 멈출 때쯤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며. 가네코 미스즈는 이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