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예전에 한동안 건넛집 아이들 소리에 시달린 적이 있다. 밤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면 훈육한다고 꾸중하는 어른 목소리가 몇 배 더 시끄러울 때도 있었다. 통장님을 통해 문제의 집에 항의하는 데서 시작하여 여러 방법을 취했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제일 목소리 큰 아빠가 창문 열고 조용히 하라고 버럭 소리지르기를 여러 번, 어느 날부터인가 건넛집에 불이 켜지지 않더니 아이들 소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마도 이사를 간 모양이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건넛집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왔고, 언제 그렇게 시끄러웠냐 싶게 그곳은 조용해졌지만 가끔 후회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한창 자라는 때의 아이들은 시끄러울 수 있고, 동네에 마땅히 아이들이 놀만한 장소도 없고, 집에 몇 시간 있지 않는 내가 좀 더 참아도 되는데 너무 눈총 준 것 같았다. 그즈음 SNS에서 비장애인 성인 위주 사회의 어린이가 겪는 일상의 어려움에 관한 글을 자주 읽은 영향도 있었다. 그런 글을 읽고 나면 내가 어릴 때 잘 몰라서 했던 실수나 엉뚱한 행동(어른들은 말썽으로 취급하는)이 기억났다. 이 세상 모든 어른이 그렇듯 나도 시끄럽고, 서투르고, 그런 주제에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무모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으니까.
출간 직후부터 입소문이 자자했던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전자책으로 사두고 묵히다가, 어린이날 특별 리커버판 표지가 너무 귀여워서 종이책을 냉큼 샀다. 새싹을 들고 행진하는 어린이들이라니! 그렇다. 어린이는 양지바른 토양에서 소중히 보호받으며 무럭무럭 자라야 하는 새싹이다. 그런 어린이들에게 한국사회가 어떤 토양인지 궁금하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에세이로 분류되지만 사실 이 책은 어린이에게 예의를 지키는 방법을 담은 '어른 교육서'에 가깝다. 우선 저자인 김소영이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어린이를 바라보고 어린이의 입장을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다. 그가 어린이를 대하는 자세에 나를 비춰 보면 몹시 부끄럽다. 그리고 책 속 어린이들의 행동과 말에 나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면서 어린이를 좀 더 잘 알게 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정중함과 점잖음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애들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는 말이 있다. 어린이는 어른의 말과 행동을 모방하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초록불에 횡단보도 건너기, 줄 서서 버스 타기, 음식 먹을 때 소리 내지 않기 등등 어린이는 배워서 익숙해져야 할 것이 많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대체로 어린이가 규범과 예절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린이가 끼치는 소위 '민폐'는 일부러 그러는 것보다 잘 몰라서, 행동이 어설퍼서, 그 장소에 있기 불편해서 저지른 실수가 대부분일 텐데 말이다. 민폐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민간에 끼치는 폐해'라는 뜻인데, 솔직히 어린이가 사회에 폐를 끼치면 얼마나 끼친다고 이런 무거운 단어로 비난하나 싶다. 어린이의 실수를 하나하나 리스트화해서 노키즈존을 설정할 구실을 만들어내는 어른들이 실은 더 세상에 민폐가 아닐는지.
그렇지만 세상에 못된 어른만 있는 건 아니다. '위로가 됐어요'라는 소제목의 글에 따뜻하고 큰 울림을 주는 일화가 나온다. 저자의 독서교실에 다니는 한 어린이가 일요일에 영어 과외를 하러 가다가 만난 낯선 아주머니에게 "일요일인데 공부하느라 힘들겠구나."라는 말을 들었단다. 그래서 기분이 어땠냐고 물으니 "위로가 됐어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어려운 영어를 공부하러 가는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어른.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는 어린이에게 우산 속 자리를 나누는 어른. 만원 버스에서 어린이가 다칠까봐 온몸으로 버티는 어른. 김소영의 말대로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 세계"다. 그렇게 보면 어린이가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만 욕할 일이 아니다. 어린이에게는 부모님 외에도 만나는 모든 어른이 양육자이고 선생님이니까.
나는 '남의 집 애'라는 말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남의 집 엄마' '남의 집 아빠' '남의 집 이모 삼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떤 어린이의 '남의 집 할머니'도 될 수 있다. 어린이의 초콜릿을 지퍼백에 넣어 주고, 어머니에게 어깨를 빌려 드리면서 나도 한몫을 할 수 있다. 양육자가 아니어도 '남의 집 어른'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김소영의 책이 계기가 되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남의 집 애'를 한 명 키우고 있다. 정부가 취약계층 아동의 기초자산 형성을 위해 운영하는 '디딤씨앗통장' 후원을 통해서다. 후원자가 매월 일정 금액을 저축하면 국가와 지자체가 월 5만 원 내에서 동일한 금액을 매칭 지원하는 사업으로, 아동이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고 한다. 이 금액이 어떤 어린이의 이름으로 저축되는지 나는 모른다. 사는 곳도, 나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월 5만 원으로 독립의 첫 단추를 꿰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어린이가 세상의 부드러움을 맛보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랄 수 있다면, 내가 번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어린이의 환경이고 세계인 어른으로서 어린이 양육을 함께 부담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그러나 어린이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어린이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어린이가 참으로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을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사회 안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으면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를 공공장소에서 배제하는 사회는 어린이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데 실패한 사회다. 어린이가 불편하다고, 시끄럽다고, 위험하게 뛴다고 눈총 줄 것이 아니라, 어린이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어린이가 사회에 다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어른이 할 일일 테다. 나도 아직 잘 못하는 일이긴 하지만.
어른들은 흔히 "애들을 위해서 말을 가린다"라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우리 어린이들이 어른들 보아 가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어린이는 작은 키와 적은 경험으로 어른들의 기준을 맞춰주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나도 연휴에 놀러 온 아홉 살짜리 조카가 보드게임 점수를 계산하느라 종이에 연필로 숫자를 적어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느꼈다. 어린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른들을 한정 없이 이해하고 기다려준다는 것을. 어른이 약속을 어겨서 서운한 마음에 훌쩍이다가도 금세 잊고 다시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어른보다는 어린이라는 것을. 지금은 그런 어린이를 위해 어른들이 어린이의 눈높이로 세상을 새롭게 보아야 할 때다. 그것이 어린이에 대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