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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랑B Oct 11. 2021

시련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며칠 전 장애 언론 <비마이너>에 실린 장애해방운동가 박길연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총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였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장애인이 되어 16년을 집안에서 살다가 장애운동가로 거리에 나서게 된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대하소설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도 아니고, '사지 멀쩡'하다가 병에 걸려 신체의 자유를 잃었는데도 그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캄캄한 새벽, 독서등 하나 밝혀놓고 기사를 읽어나가는 내내 되뇐 혼잣말이었다. 나는 갑자기 불구의 몸이 되면 여생을 담과 절망 속에서 살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지금보다 더 장애인 지원제도가 미비했던 시절을 살아왔으면서 어떻게 이렇듯 씩씩할 수 있을까?


 어제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았다. 젊어서 결혼과 이혼을 하고 홀로 키운 두 아들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은 자연인 이영주가 주인공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떠오르는 아들들 생각 때문에 미칠 것 같아서 몸을 혹사하기 위해 17년 동안 뱃일을 했단다. 그러다 친해진 이웃에게서 깊은 상처를 받고 다시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며 산속으로 들어왔단다. 그토록 큰 슬픔과 상처를 지닌 가슴이건만, 그는 밝고 건강하고 씩씩했다. 싱싱한 나물과 약초를 찾아 요리해 먹고 황토를 발라 집을 짓고 나무도 심으면서 하루하루를 옹골지게 보내고 있었다. 그는 산에 들어온 후에야 자신을 위해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들들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 지었으나 아침이면 다시 기운찬 얼굴이 되었다. 그를 보면서 삶은 눈물과 웃음과 시련과 행복으로 얼룩덜룩 맞춰지는 조각 퍼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주인공이 시련 속에서 하는 단골 대사가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가요?" 어떻게 해도 이 시련을 벗어날 수 없어서 하는 말 같지만, 그 속에는 뭔가 시련이 닥친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함의가 있다. 현실에서건 드라마에서건 사람은 시련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걸 인생의 동력으로 삼으려 한다. 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박길연자기 자신을 돌보면서 시련을 끌어안은 이영주처럼.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가혹한 시련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아 삶을 지탱하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유태인들은 가족, 친구, 소지품, 인간성,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모조리 빼앗겼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무척 충격받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구타와 모욕과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빅터 프랭클 자신은 옆에서 동료가 신발에 발이 들어가지 않아 프게 울고 있는데도 빵을 게걸스럽게 먹는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이쯤 읽으면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보기 좋게 빗나간 추측이었다. 물론 이기적이고 잔혹한 인간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힘든 현실을 잊도록 동료를 돕고, 아닌 밤중에 바이올린을 켜고, 생사조차 모르는 아내를 떠올려 따뜻한 사랑으로 마음을 채운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은 가지는 인간이 시련을 극복하는 힘은 실로 강하다는 것이다. 질병으로 사지가 마비되고 자식을 잃고통 속에서도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 '내가 왜 살아야 하지?'라는 물음은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외침이다.


 운 좋게 가스실로 보내지거나 굶어 죽지 않았다 한들 그것만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책에 묘사된 강제수용소의 상황이 너무나 참담해서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런 현실에 처한다면 고압전류가 흐르는 담장에 몸을 던져버릴 것이 빤해서였다. 그러나 사람이 죽음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자살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은 알고 있었다. 죽기로 결심할 힘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어차피 가스실로 보내질 운명이니 어떻게 죽든 상관없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직시하고 맞서 싸우려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 해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도저히 이성적이지 못같은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내에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것은 단순한 계산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사람은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선택에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하고, 그것을 타인에인정받고 싶어 한다. 삶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끼는 것은 누구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것은 장인도, 자식 잃은 어머니도, 강제수용소 수감자도 마찬가지다. 밖에서 보기에는 저러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건 외부의 시선이고, 내면의 시선은 극한의 고통에서도 희망을 찾는다. 어둠 속에도 빛은 있으니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삶도 이러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한다. 감정적이고 쉽게 비뚤어지고 때로는 탐욕과 이기심에 물들지라도 인간에게는 그 모두를 압도하는 이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이토록 많은데 나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크든 작든 인간은 시련을 겪게 되어 있고, 고통은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다. 시련을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지만(빅터 프랭클은 의도적인 시련과 불가항력의 시련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운명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부여한 시련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 그것을 묘사한 빅터 프랭클의 문장들을 보자.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흔히 건네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들은 지내놓고 보니 그것도 추억이더라는 말을 종종 한다. 당시에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살아지더라는 기억. 다시 겪고 싶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자신을 칭찬하는 삶. 박길연, 이영주, 빅터 프랭클의 삶은 그런 삶이고, 또 그런 삶이었다. 그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내 삶 또한 살아 있음에 책임을 다하는 삶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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