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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랑B Oct 23. 2021

잘 쉬어야 잘 산다

존 피치&맥스 프렌젤, <이토록 멋진 휴식>

 추리소설의 대가 애거서 크리스티는 주로 20세기 중반을 작품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태어나 가정교사를 두고 교육을 받았고, 두 차례 세계대전과 산업화를 거치며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소설을 집필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이 든 인물들은 사라져 가는 옛것을 그리워하현대식 생활방식과 문화에 거부감을 드러내곤 한다. 그가 창조한 두 명의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제인 마플도 중앙난방장치가 있는 집에 살지만 대인관계, 음식, 취미 등에서는 꽤나 보수적인 인물들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꼰대'라 부를 만 한데, 사실 옛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다 고리타분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최근에는 현대인들이 그간 낡았다고 치부하며 멀리했던 전통의 가치가 사람들의 사고 변화와 더불어 재조명받고 있으니 말이다.


 휴식에서도 옛날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고 느낀 것은 존 피치와 맥스 프렌젤이 집필한 <이토록 멋진 휴식>(원제:Time off)을 읽고 나서였다. 이 책에는 인류문명 발전에 기여한, 혹은 세계 판도를 바꿔놓은 명사의 사례가 숱하게 나온다.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예술 영역뿐 아니라 자연과학, 스포츠, 저널리즘, 현대 공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Time off, '효과적이고 의도적인 쉼'을 가진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르브론 제임스, 에드 우디 엘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업가이자 공학자인 스티브 잡스는 매일 몇 시간씩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대다수가 산책을 중요한 일과로 여겼다.



<이토록 멋진 휴식> 전자책.



 산책은 소수 천재들의 전유물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부분 식전 산책을 즐긴다. 사건을 관통하는 중요한 통찰은 사람들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시며 나누는 평범한 화 속다. 안락의자형 탐정 제인 마플은 종종 마을을 거닐다 범죄 해결의 열쇠를 찾는다. 마찬가지로 앉아서 생각하기가 주특기인 푸아로는 호박을 재배하거나 흐트러진 물건을 정리하는 취미가 있다. 크리스티 자신도 정원 가꾸기와 집 꾸미기가 평생의 취미였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면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여행을 떠났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매일 하는 산책에서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근대까지만 해도 산책은 명사에서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길 수 있는 여가이자 취미활동으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유형의 일은 활발히 일에 임하는 시간만큼이나 쉼과 긴장 풀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쉴 때 뇌는 부지런히 기억을 조합하며 조용히 당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 DMN이 활성화되면 우리의 직관이 주도권을 가지고, 창의성과 문제해결 기술이 보다 더 비단선적으로 움직이며 멀리 있는 요소와 연관점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산책이나 샤워 도중에 강력한 생각이나 통찰이 떠올랐다면 DMN에 감사하라. 당신이 푹 쉬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DMN은 조용히 당신이 해결하려던 문제에 관한 '큰 그림' 전략이나 창의적 돌파구를 탐색하는 중이다.



 DMN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약자다. 뇌 과학에 따르면 우리 뇌는 쉬는 동안에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휴식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이 일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다를 뿐이다. 소위 '멍 때리는' 순간에도 뇌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다수 명사의 경험에 비춰보면 뜩이는 영감은 주로 과제를 벗어나 다른 활동을 하는 동안 떠오른다. 이건 우리네 평범한 일상에도 종종 있는 일이다. 하밤 푹 자고 일어나면 고민으로 무겁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거나,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오면 답답한 마음이 풀린다거나, 번뇌를 잊기 위해 짧은 여행을 계획한다거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문제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인간이 오랜 세월 '의도적인 쉼'을 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이용해왔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충분히 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례를 찾을 필요가 없다. 불과 내가 1년 전에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많아야 사흘, 어떤 때는 하루 쉬고 계속 출근하는 날이 몇 달간 이어졌다. 처음 몇 주먹고 자는 것만으로 웬만큼 피로를 수 있었지만, 한 달이 넘어가자 효과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를 기본으로 깔고 가자 신경질적이 되고 무엇에든 30분 이상 집중하기 힘들어지고 주일에 무감각해졌다. 책도 잘 읽히지 않았다. 아마 내 인생에서 SNS 중독이 제일 심했던 시기일 것이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서와 SNS 활동에 몰두했는데 피곤해서 집중력이 저하되니 고 휘발성 강한 단문 위주의 SNS로 빠져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 같다. 쉴 때는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지금도 회사문을 나서면 일이건 동료와의 잡담이건 회사 관련 생각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운다. 그래야 진짜로 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요령이지만 이것이 아니었다면 내 건강은(몸과 정신 모두) 좀 나빠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타임오프의 본질은 의도성이다. 타임오프는 다른 무엇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자(혹은 아무것도 안 하고자) 특정 행동을 삼가는 것이다. 특정 행동이 무엇인가는 각자가 결정할 몫이다.



 이 책에 추천사를 쓴 정신과 의사 문요한은 저서 <오티움>에서 양질의 휴식을 취하려면 평소 업무와 반대되는 활동으로 균형을 맞추라고 말한다. "의자에 오래 앉아 머리를 썼다면 주말에는 머리를 쉬고 산책이나 운동하며 몸을 움직여야 한다. 반대로 너무 몸을 혹사한 사람이라면 주말에는 몸을 쉬게끔 하고 독서나 음악 감상을 통해 정신적 자극을 주어야 한다." 나는 하루 종일 설비 앞에 서서 일하기 때문에 주말에는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는다. 직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간혹 집에서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냐는 질문을 받는데, 외출을 하지 않아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많다. 하루 중 10시간은 잠을 자고(낮잠 포함), 책을 두 시간에서 세 시간쯤 읽고, 나머지 시간에는 글을 쓰고 홈트레이닝을 하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수다를 떤다. 물론 장을 보러 나가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외출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일 때문에 혹사하는 눈, 허리, 무릎과 발목을 충분히 쉬게 하고 회사 지시대로 작업하는 수동성에서 탈피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는 것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해 양질의 휴식을 취하면 장담컨대 월요일 출근이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일도 더 잘 된다. 하다못해 취미로 글을 쓸 때도 몇 시간 연속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기보다 중간중간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리며 잠시 스위치를 내려야 더 잘 써진다. 취미활동이 이럴진대 업무와 학업 중 휴식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할까. 통통 튀는 발상이 필요하면 안 나오는 아이디어를 빨리 나오라고 독촉할 것이 아니라 낮잠을 자야 한다. 또한 공부하기 전 수면은 단기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를 깨끗이 비워서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도록 한다. 휴식의 기본 중 기본은 충분한 수면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휴식>에서는 수면 과학자 매튜 워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우리는 잠에 게으름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우리는 바쁘게 일하고 있음을 얼마나 적게 자는지로 표현한다. 수면 부족이 영예훈장이 되었다. 알고 보면 충분히 잠을 잤을 뿐인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꾸짖는다. 그들이 나태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잠을 과소평가하는 직원을 과대평가한다."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은 많은 사람이 잘 못하는 일이다. 나도 일곱 시간 이상 자려고 애쓰지만 이런저런 핑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미루기 일쑤다. 저자들이 말하듯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표준 근무시간 자체가 개인의 생체 리듬이나 사정(회사와 집 간의 거리 등)에 관계없이 획일적인 해법을 강요하는 관습이라 쉴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 많다. 따라서 퇴근한 뒤에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여가를 보내려면 수면을 줄여 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탄력근무제가 도입되고 주 4일 근무제가 논되는 배경도 사회 전반에 잠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성인이건 미성인이건 평균 수면시간이 8시간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다시 한번 책을 인용하자면 "오전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19시간 연속으로 깨어 있는 사람의 인지 능력은 음주운전자의 인지 능력과 비슷하다." 잠이 부족한 상태로 열심히 공부를 해보아야 잘 될 리가 없으며, 무뎌진 인지 능력을 가지고 몇 시간씩 회의며 미팅을 해봐야 능률이 좋을 리가 없다.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땐 과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고 움직여야 한다. 몸이 녹초가 되었다면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긴장을 풀어야 한다. 좋은 휴식을 취할 때 꼭 고가의 레저상품을 구입하거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잠시 햇빛을 쐬며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다른 세상을 체험하면 매력 없는 잿빛이던 일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의 기쁨과 충만함은 돈으로는 사지 못하는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쉼과 더 좋은 정신의 양식이 필요하다.



"더 많은 게으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무엇보다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 대신에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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