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배우고 있는 스포츠센터의 지리적 특성 때문인가, 강습생의 99%가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다. 몇몇분은 늘 샤워실에서 큰 소리로 담소를 나누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소소한 당신들의 일상에 대해 강제청취하게된다. 최근의 화두는 단연코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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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번에 새우젓을소래포구 가서 직접 사왔잖아. 엄청 실해 ” “난 동생이 여수 살아서 갓을 키워서 항상 보내줘. ” “난 통영에 굴을 아예 대놓고 먹는 집이 있잖아. 진짜배기.” 쇼미 사이퍼 배틀 뺨때리는 할미넴들의 김장재료 배틀은 다 씻은 후 라커 앞에서까지 쭉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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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옆에서 양념통 뚜껑 열기 심부름 하는 것이 신났다. 그러나 결혼하고나서부턴 손 큰 K-장녀 시어머니의 김장은 내게 노동이었고 숙제였으며 시험이었다. 당신 표현에 따르면 ‘절인배추에 양념으로 색칠공부나 하고 있을‘ 뿐이었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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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은 그 집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또한 누구와 함께 만들어 완성품을 나누는가를 보면 그 집안이 맺고 있는 ’관계‘의 모습, 깊이와 넓이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1년에 한 번, 정해진 기간에 집집마다 가족과, 친척과, 때론 이웃과 모여 돈과 시간과 노동을 쏟아붓는 종합예술 아니 종합사회활동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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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에선 시어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동생 며느리 딸 남편 아들들에게 각자의 할 일을 배당하고 착착착. 시행 날짜를 계획, 배추와 고춧가루와 소금과 각종 부재료 선택, 절여진 배추의 적정 염도 판단, 양념 맛 최종 결정,완성품 보관 장소, 분배의 모든 권한이 단 한 사람의 리더- 시어머니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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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김장은 어떻게 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동 없이 김치만 획득한 김치루팡이 되었다. 시아버님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머님도 예전 같지 않으신 상황이라 소소하게(?) 식구들 먹을만큼 20포기(?!)만 혼자 하셨다고. 남편 왈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오래간만에 생기가 돌았다며..김장은 어머님에게도 나와는 다른 의미의 숙제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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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시댁서 김치속 얹은 굴보쌈을 한 입 야무지게 와앙 넣으며 생각해본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 진작에 우리 김여사님(시어머님)께 손맛을 전수 받았었어야 했는데...요리 똥손으로 태어난 이번 생은 아무래도 글른 듯 싶다. 다행히 남편의 유전자를 받은 딸은 쩝쩝박사에 절대미각의 소유자. 니가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 받아 엄마 김치좀 담가주지 않으련? 영원한 김치루팡, 꿈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