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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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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바람 Dec 13. 2023

영원한 ‘김치루팡’을 꿈꾸며


수영을 배우고 있는 스포츠센터의 지리적 특성 때문인가, 강습생의 99%가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다. 몇몇분은 늘 샤워실에서 큰 소리로 담소를 나누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소소한 당신들의 일상에 대해 강제청취하게된다. 최근의 화두는 단연코 ‘김장’.

“나 이번에 새우젓을소래포구 가서 직접 사왔잖아. 엄청 실해 ” “난 동생이 여수 살아서 갓을 키워서 항상 보내줘. ” “난 통영에 굴을 아예 대놓고 먹는 집이 있잖아. 진짜배기.” 쇼미 사이퍼 배틀 뺨때리는 할미넴들의 김장재료 배틀은 다 씻은 후 라커 앞에서까지 쭉 이어지고...

어릴 땐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옆에서 양념통 뚜껑 열기 심부름 하는 것이 신났다. 그러나 결혼하고나서부턴 손 큰 K-장녀 시어머니의 김장은 내게 노동이었고 숙제였으며 시험이었다. 당신 표현에 따르면 ‘절인배추에 양념으로 색칠공부나 하고 있을‘ 뿐이었어도 말이다.

김장은 그 집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또한 누구와 함께 만들어 완성품을 나누는가를 보면 그 집안이 맺고 있는 ’관계‘의 모습, 깊이와 넓이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1년에 한 번, 정해진 기간에 집집마다 가족과, 친척과, 때론 이웃과 모여 돈과 시간과 노동을 쏟아붓는 종합예술 아니 종합사회활동이라고나 할까?

시댁에선 시어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동생 며느리 딸 남편 아들들에게 각자의 할 일을 배당하고 착착착. 시행 날짜를 계획, 배추와 고춧가루와 소금과 각종 부재료 선택, 절여진 배추의 적정 염도 판단, 양념 맛 최종 결정,완성품 보관 장소, 분배의 모든 권한이 단 한 사람의 리더- 시어머니에게 있다!

그래서 이번 김장은 어떻게 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동 없이 김치만 획득한 김치루팡이 되었다. 시아버님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머님도 예전 같지 않으신 상황이라 소소하게(?) 식구들 먹을만큼 20포기(?!)만 혼자 하셨다고. 남편 왈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오래간만에 생기가 돌았다며..김장은 어머님에게도 나와는 다른 의미의 숙제였나보다.

주말에 시댁서 김치속 얹은 굴보쌈을 한 입 야무지게 와앙 넣으며 생각해본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맛. 진작에 우리 김여사님(시어머님)께 손맛을 전수 받았었어야 했는데...요리 똥손으로 태어난 이번 생은 아무래도 글른 듯 싶다. 다행히 남편의 유전자를 받은 딸은 쩝쩝박사에 절대미각의 소유자. 니가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 받아 엄마 김치좀 담가주지 않으련? 영원한 김치루팡,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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