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 그래서 깊고 넓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을 때, 거울 속 벗은 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느슨히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끊어질 듯 가느다란 글자,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얼마 전 오른쪽 가슴 밑에 새겨넣은 내 생애 첫 타투(tattoo)다.
‘ À moi mes danses ‘ 프랑스 시인 에메 세제르의 대서사시 ‘귀향 수첩’의 한 구절로, 정확히 직역하긴 어렵지만 ‘나에게 내 춤을‘ 이라는 뜻. 혹은 문맥상 ’내 춤은 나의 것/내게는 나의 춤을‘ 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이 문장은 르 클레지오의 소설 ‘황금물고기’ 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납치된 흑인 소녀 라일라의 성장을 그린 책이다. 전 세계를 헤매이던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각성(覺醒)의 순간을 맞이할 때 거리의 사람들에게 읊어준 시의 첫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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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À moi mes danses
la danse brise-carcan
la danse saute-p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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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에게 내 춤을
족쇄를 깨는 춤을
속박을 벗는 춤을
”
‘황금물고기‘는 머리맡에 늘 두고 지내는 책이지만 왜 갑자기 이 부분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가슴이 터질듯이 쿵쾅댔다. 찾았어. 내 몸에 새길 말. 불어로 된 원문을 확인하고 싶어 홈웨어에 패딩만 걸치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 반 걸려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 에메 세제르의 '귀향 수첩'과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 원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사실 타투이스트와 일주일 넘게 디자인 시안을 주고받은 문장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술 예약일을 하루 남겨 놓고 갈팡질팡했다. 아예 하지 말아버릴까, 하던 차에 홀린듯이 만난 문장이다!
이십 몇 년도 더 전 - ‘황금물고기’의 저자 르 클레지오는 ‘무슨 꿈을 꾸느냐’는 내 질문에 ‘어젯밤 꿈에 새가 날아와 함께 가자 했는데 가지 않았다’ 며 ‘당신과 꿈 얘길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고 책에 사인과 함께 적어주었더랬다. 그래서 À moi mes danses 옆에 작은 새를 그려 넣었다. 비로소 마음에 꼭 드는 도안이 나왔다. 내 몸에 새길 문장의 서사가 완성되는 순간.
자, 드디어. 으스스하고 어둡고 신비스러운 공간, 고스족 같은 외모의 타투이스트를 떠올렸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청결하고 산뜻한 화이트톤의 까페 스타일 인테리어.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의 젊은 청년 타투이스트가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복잡한 도안이 아니라서 계약서 작성, 준비와 시술, 후처리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시술한 위치(앞가슴 밑 브래지어 라인)는 통증이 심할 수 있다는데 웬걸, 아프지 않았다. 그냥 따끔한 정도? 완성된 후에도 그냥 조금 화끈할 뿐 이었다는. 타투를 하고 나서 한동안 둥둥 떠다녔다. 어제의 나와는 다른 나, 세탁할 신분도 없지만 마치 신분 세탁을 통해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중요한건 타투의 위치상 벗어야 (혹은 벗겨야?) 볼 수 있다(보인다)는 점. 이제 (벗을) 준비가 되었나요? 매일 묻지만 답은 아니요. 네. 아니요 네니요 네? ......
죽기 전에 단 한 번은, 온전히 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낯선 곳에서 눈 뜨고 금지된 것들을 탐해 보고 싶다.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고 높은 하늘 위를 날고 싶다.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고 싶다. 생을 마칠 때 한 톨의 욕망과 미련도 남기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 인생 뭐 있어
바라는 데로 흘러가는게 인생이지. 몸에 새긴 내 작은 새가, 그 방향을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