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프라하의 입시학원

혼자 만들고 혼자 다닌.

by 스체나 scena


한국에서 입시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는 아무래도 10대 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조금은 잔인할 만큼 치열하고 버겁다.

하지만, 한편으로 느끼는 지점은 그 버거움을 감당할 체력을 갖춘 나이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과 안쓰러움을 느낀다.


예체능에서 가장 높은 비중으로 성적을 차지하는 분야는 아무래도 미술이었다. 음악이나 체육보다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그럴까. 미술은 여타 인문계와 비슷하게 성적이 나와야지 원하는 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기에 실기 준비와 더불어 반드시 수능점수가 잘 나와야만 했다.

학교가 끝나면 17시, 바로 미술학원에 가서 매일 다른 석고상들과 다양한 오브제들(콜라, 사과, 물통, 컵과 같은 정말 일상의 모든 소품 등)을 그리고, 22시에 끝나 독서실에 오면 23시, 늦은 저녁을 먹고 23:30 이 되어서야 정말 수능과목 공부를 한다. 하지만 독서실도 새벽 2시면 끝나기에 집으로 와서는 새벽 4시까지는 더 공부를 하다가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죽을 만큼 피곤했던 기억은 사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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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앙과 아리아스 석고상


다만 엄청난 정신적 압박으로 힘들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화장실에서 혼자 울던 기억, 독서실에서 혼자 울던 기억, 일기를 쓰고 다짐을 하고, 각자의 독서실에서 친구와 전화하며 위안이 되었던 기억이 선명할 뿐이다.

체력적으로 힘들거나 버겁진 않았다. 물론 분명 중간중간 영양제를 맞으러 병원에 가기도 했고, 엄마가 챙겨주시는 많은 집밥 그리고 기도가 나를 지탱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다소 매정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입시 생활을 보낸 직후에 떠난 유럽이기에 감사하게도 그 기세를 몰아 또 한 번의 입시를 치를 수 있었다.

몸이 그 치열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한국 대학 입시 루틴의 수혜자였다고 생각한다.)




그중 스스로도 가장 놀랍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프라하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입시 미술학원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사실 나는 사교육 키즈다.


기억에 4세부터 유치원을 다녔다. 그 당시 다른 친구들은 보통 6-7세부터 다녔던 유치원을 나는 유아원 개념으로 4세부터 터줏대감이 되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다녔고, 심지어 내가 다니던 유치원 원장님은 한 건물에서 종합학원을 운영하시기에 어느덧 나는 그 건물의 모든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잔인한 거 아닌가라고 하면, 나는 지극히 익숙했기에, 그리고 동네 친구들, 교회 친구들이 결국 다 같은 학원을 또 다니기에 나에게는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그렇게 고 3까지 이어졌던 루틴과 학원 생활의 모든 족쇄가 풀린 19세의 나이로 유럽에 덩그러니 있게 된 나는 매일 나가서 그림 그릴 장소가 필요했고, 함께 그려야 하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한국의 입시와 유럽의 입시는 아예 모양 자체가 다르다. 점수로 수치화되어 있지 않다. 특히, 미술은 더더욱 체계가 있지 않았고, 그야말로 ‘예술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정형화된 한국형 입시 미술과 한 몸이던 나는 프라하에서 바로 입시 시험을 치려 하니 뜬구름 잡는 것만 같았다. 입시 컨설팅을 받을 선례가 있지도 않았고, 미술학원도 전무했다. 일단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고이 가지고 간 석고 수채화 몇 점을 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도 없었다.


연고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가버렸던 프라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시가 한복판을 지나 까를교를 건너기 직전 자리한 DAMU(국립공연예술대학교) 무대미술과 건물을 매일 같이 맴돌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조차도 용기가 나지 않아 학교 아뜰리에까지 가지도 못했고, 1층의 게시판만 덩그러니 바라보았다.


지금은 가장 친근한 건물이자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그 건물이 당시에는 눈치 보이고 주눅 드는 거대한 성과 같았다. 더구나 무대디자인 아뜰리에는 가장 꼭대기 층이었고, 수업이 없는 날은 다들 문 닫고 다소 폐쇄적인 분위기이기에 접근이 쉽지 않았다.


구시가에서 까를교 가는 길목에 무대디자인 아뜰리에가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입학을 위한 포트폴리오 지도할 선생님 구하는 광고를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의 소통을 위한 체코어가 급해서 일단은 스스로 포트폴리오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정하며 입시학원을 만들게 되었다.


어디서나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기에 집에서 ‘미술’이라는 단어로 모든 아뜰리에며 화방이며 미술 학원 등을 찾았고, 시내와 집 근처 미술교습소 같은 곳을 찾아갔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있었던 기억, 그리고 전투적이었던 한국과 다른 정말 취미로 그리는 학생들이 있을 뿐이었지만, 내 상황과 필요를 이야기했고, 아마 매우 일방적이었을 것이다. 체코어가 아닌 영어로 말했고, 체코인들도 영어가 원활하지 않기에 우리는 아마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애당초 전투적으로 몰아붙이듯 그림을 그리는 곳이 아닌 분위기에 매일 가기가 민망한 탓에, 시내에 다른 미술학원을 섭외해서 요일을 다르게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신기한 점은 한국에서는 비싼 독일제 혹은 일본의 수채화 물감과 붓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험을 못 볼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강아지 털 같은 붓 (즉 뻣뻣하기 그지없고, 물감이 잘 묻는 느낌도 없던)에 색감도 탁해 보이는 템페라를 쓴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붓과 맑은 수채화 물감에 길들여진 나에게 그 혼탁하고 꾸덕한 느낌의 템페라와 개털 붓은 참 힘들었다.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덧 그들의 투박하고 거친 그림의 맛을 발견했고 내 그림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수채화가 익숙한 나는 자주 한국에서 그렸던 그림들을 그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반대로 그 청명한 수채화가 신기한 체코 아이들은 내 그림을 신기하게 쳐다봤었다.




어느 날 체코 원장님이 나를 위해 준비해 오신 체코 무대디자이너의 책을 보여주시면서 그려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처음 무대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대라고? 나는 이런 무대를 본 적이 없는데'라는 생각이었지만 애써 준비해서 직접 펼쳐주신 마음에 감동도 받았고 일단 따라 그렸다.

이제는 안다. 그때의 그 그림의 주인.

바로 체코의 무대디자인 초석을 다진 DAMU 의 초대 교수님이자 무대디자이너 František Tröster(프란티셱 트레스터)였다.

프라하의 무대디자이너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Josef Svoboda(요제프 스보보다)를 말할 것이다. 사실이다. 스보보다는 20세기의 무대디자인을 바꾼 인물이며 무대가 장식이 아닌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을 증명했고, 무대미술이 아닌 시노그래피(scenography) 의 개념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프라하에는 두 명의 양대산맥과 같은 무대디자이너가 있었고, 스보보다가 전 세계를 누비고 있을 때, 트레스터는 프라하에서 무대디자인의 학문적 기틀을 잡았다.


Frantisek Troster 의 무대스케치

곧 사랑하게 될 무대디자인을 만나기 전 시간들은 스스로 만든 입시 미술학원과 독서실 대신 도서관을 찾아 체코어를 공부하는 지난한 시간이다. 도서관 역시 한국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칸막이가 있는 각자의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흡사 해리포터의 영화와 같이 웅장한 천장과 그림, 초록빛 나는 유리 스탠드, 고서적과 함께하는 공간에 처음에는 감격하며 구경만 했던 그 공간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도서관의 인테리어와 분위기에 마냥 취해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입시가 끝나고 다시 스스로 만든 입시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