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마르틴.

그리운 마음에.

by 스체나 scena

프라하에 간 단 한 가지 이유,

DAMU*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마치 여리고성을 도는 것처럼 학교 주변을 맴돌고, 엿보던 시절이 있었다.


무대디자인 아뜰리에는 5층에 있다. 하지만, 무작정 가면 닫혀있을 때가 많았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학생들이 가득했고 분주했고, 바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1시부터 6시까지는 콘줄타체*(konzultace)라고 하는 교수님과의 일대일 작업 비평시간이다. 아마 지금도 여전히 그 시간일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우연히 간 그날이 그 콘줄타체하는 시간이었으리라. 그럴 때면 모든 학생들은 마감일을 지켜야 하듯, 쫓기고 분주하고, 긴장감도 있고, 동시에 끈끈한 동지애도 생긴다. 그때 교수님께 거절을 당하면 다시 원점으로 가는 일이 부지기수이기에.


낯설고 설레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키가 크고, 단발의 웨이브가 있는, 어딘지 아시안 같으면서 외국인 같았던 남학생이 다가왔다.


상냥했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왔어?”


하지만, 그 외에 그 공간에 많았던 학생들은 전혀 나에게 다가오거나 , 친절하게 안내를 하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워낙에 관광지 한복판에 있는 학교라 관광객들이 무슨 건물인지 들어오기가 비일비재했고, 학교 문만 나가면 절반 이상이 아시아 관광객이니 전혀 내가 신비롭거나 궁금하지 않았을 거다.

혹은 체코인들은 의외로 소극적이고 수줍다.


나도 모르게 그 남학생의 질문을 받고는 마치 옷가게 점원에게 ‘그냥 돌아볼게요’라고 하듯 말하고는 수줍게 나와버렸다.


하지만, 그의 아우라와 모습은 굉장히 기억에 강하게 박혔다. 그러고는 신기하게도 우리는 프라하의 구시가지에서, 작은 골목 어귀에서 이따금씩 스치게 되었다.

모델 같은 그의 모습은 어디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외모였기에 늘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학교 앞, 이 길은 구시가와 까를교를 이어주는 길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우리는 같은 방을 쓰는 석사생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스보보다”.


꿈같았다. 마치 연예인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는 체코인 아버지와 바이칼호수의 나라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부모님은 각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유학시절 만나셨고, 결혼하여 프라하에서 태어난 체코인이다.

그래서 유럽인도 아시안도 아닌 듯했던 것이다.

두 분 모두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아시안인 엄마 때문인지 나를 챙겨주려고 노력했고, 늘 경청했고, 도와주었다.


마르틴은 프라하에서 유명한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여리고성을 돌았던 시절 즈음부터였을까 그는 유명 광고에도 많이 출연했고, 비주얼이 이국적이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쉬며 다른 외부활동을 많이 했고,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복학했다.


무대디자인 아뜰리에는 가장 위층에 있기에 아늑한 다락방 같다. 천장이 유리로 뚫려 있어 그날의 날씨를 볼 수 있기도 하고, 도시가 유네스코로 지정되어 고도제한으로 묶인 프라하에서 5층은 서울에서 50층이랄까. 그래서 5층만 되어도 모든 건물의 그 빨간 지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너무나 동화 속 같은 곳이다.


석사는 “클래식 무대디자인과”(연극과 오페라 무대디자인이 주를 이룬다. 사실 학부 때 연극을 가장 많이 하고 석사에는 오페라를 주로 한다.) 그리고, “영화 무대디자인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무대미술 감독이 우리 교수님이셨다. 학교에서 잘 뵙지는 못하는 토니상도 탄 유명인이다.) 마지막으로 “무대의상디자인과”가 있다. 이렇게 3개의 세분화된 무대디자인과는 각각의 작은 방을 배정받는다.


동기 석사생은 4명이었다. 한 명은 폴란드에서 학부를 나오고 석사를 프라하로 온 도미니카*(그녀는 나의 베프가 되었다. 여전히. 그리고 우리는 올해 5월에 일본에서 만난다.) 파벨* (그의 아버지는 평양에 체코 대사관을 건축한 건축과 교수이자 건축가이고, 어머니도 교수님이시다.) , 데니사*(학교 잘 안나와서 유령같았던 ) 그리고 . 그런데 어떻게 마르틴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냐 하면 그는 휴학을 길게 하고 마침 복학을 했다.

아뜰리에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

그렇게 수년 전에 설레고 떨리고 수줍게 헤어졌던, 그리고 동경했던 마르틴과 나는 같은 아뜰리에를 쓰게 되었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천재에 가깝다. 본업이 무대디자인이 아닐뿐더러 그림 그릴 시간 같은 건 전혀 없는 그이다. 워낙에 사교적인 탓에 매일 밤 파티에 가기 바쁘고, 한창 포토그래퍼로전향을 하던 때여서 다른 작업을 하기에도 바빴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1-2번 교수님과의 미팅에서 그가 가지고 오는 스케치들, 콘줄타체 직전 벼락치기로 쓱싹쓱싹 그리는 러프한 그림들.

아무래도 그는 천재였다.


가장기억에 나는 장면이 있다.

클라우주리klauzury”라고 부르는 학기말 시험이 있다.

필기시험이 아니라 전시회처럼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무대도 만들고 스케치도 하고, 의상제작도 하는 매우 큰 시험이다.


오로지 한 학기 내내 그 한 작품만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과목에 A를 받는다 해도, 무대디자인 클라우주리에서 통과를 못하면 재시험이 아닌 학교에서 아예 퇴출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시스템이다.


덕분에 사실 나는 10여 년간의 학생 생활동안 사실 단 하루도 발 뻗고 잘 잔 적이 없던 것 같다.

늘 퇴출의 불안감을 가지고 학사부터 석사까지를 살았다. 물론 매일의 삶을 누리고 즐기고 재미있었지만, 늘 한편에는 그 엄청난 부담감에 감히 맘 놓고 살지는 못했다.


그런 클라우주리를 밤새 새벽까지 준비하는 어느 날. 갑자기 마르틴은 큰 데다가 그려야겠다며, 복도에서 버려진 대형 TV의 포장 박스를 가져왔다. 1미터도 넘었던 박스였다. 그곳에 갑자기 무대를 그리는데, 말했다시피 체코애들은 투박한 템페라에 개털 같은 붓을 쓴다. 도무지 퀄리티가 나오기 쉽지 않은 그 붓과 물감인지 색만 나는 잉크였는지 그는 그 큰 박스에 당시 <카바레, kabaret> 를 그렸다.


이미 천재적인 학생들 사이에서 놀라기도 많이 놀랐던 때인데 그 박스에 5분 만에 그려버린 무대 스케치는 다시 한번 나에게 경이롭게 다가 온 순간이었다. 그런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학교에 간헐적으로 나오고, 광고 촬영으로 우선순위가 학교도 아닌 그에게 사실 많은 자비가 있었다.

모두가 은연중에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미 어느덧 중년을 향하는 마르틴. 처음 만났던 20대 초반엔 단발머리에 산뜻했다. / 그의 무대스케치


(그가 한국의 브런치를 알고 들어올 일은 정말 없을테니 올려보는 그의 사진)


DAMU* : Divadelní Fakulta Akademie Múzíckých Uměni v Pra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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