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시계, 그리고 건강
"애 안 낳을 거면 결혼 왜 했어."
흔하게 보고 듣는 말이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정해진 공식 같은 길.
산업화된 나라의 인류 대다수 사람들이 저 길을 택했다.
수많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던 행복한 4인 가족.
내가 25살 무렵까지, 아니 사실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만화가 하나 있다.
제목은 '아기와 나'
만화의 내용은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형제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박하게 담아낸 이야기다. 나는 이 작품을 전권 소장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 그건 마치 나에게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얼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아이를 낳아야지. 2명은 아쉬우니까 3명, 그리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4명도 좋지 않을까. 나니아 연대기처럼 아들, 딸, 아들, 딸. 이렇게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을 평생 갖고 살았기 때문에 2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정말 사실은 개인적인 건강 상의 이유가 가장 컸다. 오로지 엄마가 되는 것이 목표였던 28살의 나.
정말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와는 결국 25살 무렵 헤어졌다. 나와 동갑인 그 친구는 결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31살까지 기다려달라 말했다. 내 인생 가장 아프게 헤어졌다.
나는 내 몸을 잘 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 척추측만증. 임신하기엔 어려운 몸. 그나마 산부인과 간호사 출신의 엄마를 둔 덕분에 병원에서 자주 검사를 받곤 했는데, 희발성 월경이라는 것 외에는 산부인과적으론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고 했다. 노산만 피하면 된다.
척추측만증, 이게 내 발목을 붙잡았다. 결혼과 출산을 빨리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 평생의 꿈인 엄마가 언젠가는 되기 위해선 모든 결정을 빨리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심장까지 아팠던 그 헤어짐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를 26살에 처음 만났고 그 남자와 28살에 행복한 결혼식을 했다.
신부 나이 28살, 신랑 나이 29살.
내 인생의 계획처럼 28살에 결혼을 했다. 여기까지는 모두 내 계획대로 흘러갔다. 그날의 나는 분명 행복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진흙 같은 감정이 몇 가지 떠올라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그냥 이 모든 상황, 친정을 멀리 떠나서 결혼을 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두려웠다. 그리고 아무도 내 편이 없는 이 동네에서 내 편이 되어줘야 할 남편은 아직도 철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보다 더 철이 없었던 건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친정 근처로 이사를 가자고 했으나, 그는 회사 때문에 이사를 힘들어했다. 또한 이 동네는 남편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라서 그런지 더욱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 '나의' 계획만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남편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이제 결혼한 이상 '나의 계획'이 아닌 '우리의 계획'이라는 것을 신혼 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여자의 시계와 남자의 시계는 완전히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냥 살았다. 나는 서른이 되었고,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나조차도.
나, 자신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