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에서 돌봄으로
“비날, 옷이랑 가방이 너무 안 어울려.”
“그래, 안 어울리는구나.”
무심하고, 덤덤하게 대답한 나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
예전에 나는 달랐다.
의상이나 머리 같은 걸 지적받으면 금세 위축됐다. 옷을 입거나 머리를 한 뒤에는 꼭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았다. 칭찬이 아니라, 자연스러워 보이길 원했다.
“나 어때? 어울려? 어색하지 않아? 뚱뚱해 보이지 않아? 너무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아?”
끊임없이 묻고 또 확인했다. 입고 싶은 스타일이 있어도 ‘안 어울린다’는 말 한마디에 쉽게 포기했다.
나 역시 외향이나 옷 입는 모습이나 헤어스타일을 아무렇지 않게 평하는 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 예뻐졌다. 자기, 살 빠졌네. 신발이 너무 튀지 않아?”
심지어는 잘 먹는 지인을 보고 “다이어트 한다며”라는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수습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 일로 스스로 성감수성 낮다는 걸 깨달고 당황했다. 그 지인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혼자 이불 킥을 여러 번 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흰머리가 나이 먹어 보일까 봐, 습관처럼 귀찮아도 30년 넘게 염색을 해왔다. 그러나 두피 트러블이 났다. 붉은 반점이 생기고 가렵더니 허연 표피가 비듬처럼 떨어졌다. 괴로움을 참고 왜 염색을 이어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국은 타인의 눈 때문은 아니었을까?
화장과 패션, 외모 관리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를 뜻하는 이 ‘꾸밈노동’의 뿌리는 내 어린 시절, 엄마와 겹쳐진다. 늘 엄마가 하셨던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 라는 말이 철들기도 전에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1972년, 중학교 입학 때 나는 교복 치마 밑에 속바지 대신 코르셋을 입었다.
엄마에게는 옷이나 외모에 대한 자신만의 아픈 서사가 있다. 엄마는 서른 살 무렵, 심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거의 3~4년을 누워 지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에 입을 옷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 시절은 기성복보다 한복을 입던 때라 더욱 불편했을 것이다. 진료 갈 때면 이웃 아줌마의 옷을 빌려 입고, 아빠가 엄마를 등에 업고 병원에 갔다.
엄마는 건강을 되찾은 뒤 꾸미는 일에 정성을 많이 쏟으셨다. 당신 자신뿐 아니라 딸들도 단정하고 예뻐게 보이길 원했다. 나는 엄마가 기대에는 못 미쳤고, 자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 엄마가 계셔서 일까. 나는 더욱 타인의 눈에 조금도 이상해 보이거나 다르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 안에 ‘꾸밈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 깊게 뿌리내렸다.
이제 안다. 나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같은 꾸밈노동은 타인의 시선에 깊게 갇혀 있었다. 그사실을 인정하니 바뀌고 싶어졌다. 실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흰머리가 늙음의 동의어라는 생각,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은 욕구를 떨쳐버리기는 어려웠다.
엄마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이미 내 것이 되어 있었다. 염색 트러블은 가라앉았지만, 간만에 만난 지인이 염색하지 않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면 나도 모르게 염색 트러블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특별한 뭘 계획한 있는 것도 아닌데, 흰머리가 걸림돌이 될까 괜히 고민하다 멈춘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어르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어르신은 염색으로 검은 색 머리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 앞에 흰머리로 서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괜히 염색 핑계를 찾는 내 모습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수영 강습이 있는 날은 새벽 여섯 시에 집을 나간다. 남편이 차를 가지고 지방에 가고 없을 때도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버스를 타고 수영장에 간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슬리퍼 끌고 다니지 않는 건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단정함을 유지하고 싶은 내 욕구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단정하고 깔끔한 내 모습을 나 스스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했다.
염색하지 않고 흰머리로 염색하진 않고 자유로지고,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들고 싶은 가방을 들고 싶다. 그러나 단정하고 정리된 외모로 반듯하게 걷는 것은, 이제 누구를 위해서도 사회적 시선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여야 한다. 그런 나를 정성을 들여 천천히 설득 중이다. 내 정장에 선물을 받은 내 최애 스님의 바랑 같은 천 가방이 안 어울려도 괜찮다. ‘어울림’보다 ‘내가 좋음‘을 택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를 잘 돌보는 자가 된다.
#꾸밈 #엄마 #돌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