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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이는 바다에 항해 중이거든

by 이상무

이 세상은 대양과도 같다. 잔잔한 내해 말고 수평선이 일렁이는 외해 말이다. 호주에서 태평양 외해 쪽으로 고래를 보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아이맥스 화면 전체를 꽉 채운 듯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바다 전체가 움직이는 그러한 장면을 마주 대하였다.


태어나 잠들 때까지 이 세상을 살며 소통하고 의지하고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우린 얼마나 외로울까? 그 거대한 대양에 홀로 조각배 하나에 올라탄 사람과도 같을 것이다. 당장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있을지라도 불안과 고독이 마음 가득 밀려오지 않겠는가?


바닷가 해변에서 보면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온다. 하나의 파도가 돌아가면 다음 파도는 또 다시 오며, 바다가 해변에 그리는 자취는 모든 파도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 파도는 해변을 그렇게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태풍이 불면 상황은 달라진다.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이 바닷가를 강타하는 거센 바람과 일렁이는 파도는 막강한 파괴력을 지녀 우릴 위협한다. 평소의 파도는 우릴 잠시 뒤로 물러가게 하는 정도지만 이내 우릴 다시 나아가게 하는 일상에 일어나는 작은 사소한 일들이다. 하지만 태풍이 불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생의 항해에 무엇을 만날지 어떤 태풍이 불어올지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그래서 그 운명의 지도를 자신의 얼굴에서, 손바닥에서 그리고 생년월일에서 찾아보려 하기 하고, 아니면 사람들을 연줄로 이 줄 저 줄 이어가며 자신을 꼭꼭 동여 매 두려 한다. 대부분이 썩은 동아줄인데도. 아무리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사람도 들여다보면 그렇게 약한 것이 사람이다.


이 인생 항로에서 갑자기 만나 보지 못한 풍랑을 만나던지 암초를 만나 가도오도 못하던지 할 때 우린 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암울해진다. 성경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에 항해하는 배에 탄 장면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때로는 밤새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거나, 때로는 도달할 곳을 향해 가나 풍랑이 일어 거반 죽게 되었거나 때론 가야 할 방향의 역풍이 불어 밤새 노 젓느라 고생고생하는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을 기술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 같이, 때로 우린 진급에 실패하였거나, 다니던 직장이 폐업할 위기에 처하거나, 갑자기 췌장에 암의 위험이 높은 종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가족 중에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거나 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병원에 가보면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번 한밤중에 응급실 대기실 앞에 가보라. 아니면 중환자실 대기실에 가보거나 암환자 병동에 가보라. 이런 일들이 희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분들께서 말해주실 것이다. 어제까지 우리와 똑 같이 웃으며 어딘가 길을 걷고 계셨을 그분이 말이다.


그리고 큰 바람이 불어 바다에 파도가 일고 있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온쯤 갔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셔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꺼이 배 안으로 모셔 들였다. 그리고 배는 즉시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하였다. 요 6:18-21


그런데 그런 상황 중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 상황에 대해 몇 마디 하시면 모든 상황은 종료가 된다. 오죽하였으면 제자들이 이 분이 누구 시기에 바람과 파도도 이분께 복종합니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다에 고기가 많고 적고 가 문제가 아니고 풍랑의 세기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주 예수께서 계시며 우리가 그분과 연결되어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있느냐가 관건적인 것이다.


이 배는 작게는 자기 자신이나 우리의 가정일 수 있고, 당신이 이끌고 있는 직장의 한 부서 일 수 있고, 크게는 한 국가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를 보라. 불과 수년 전까지 평화를 외쳤던 유럽의 상황을 보라. 잔잔한 바닷가에 밀려오는 파도에 신발 벗고 장난치던 때에는 우리가 대단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이룩한 것이 다 나의 힘과 지략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태풍이 부는 바닷가에 우린 너무나도 작아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마가복음 4장에는 갈릴리 해변가에서 수없이 많이 몰린 사람들을 대하여 배에 오르셔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사실 호수가)로 나가셔서 배 위에서 천국에 관하여 씨 뿌리는 비유를 비롯해 천국에 관한 비밀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전하시고 저녁이 되어 맞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곤 배의 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수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알아듣도록 말씀을 전하셨으니 얼마나 곤하셨을까? '큰 폭풍이 일어나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 어느새 배에 물이 차게'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그대로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하여 '조용히 하여라! 잠잠하여라!'라고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 험한 바람과 파도와 배가 가라앉게 될 정도가 되었어도 반응조차 하지 않으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하는 소리에 깨어나셨다. 이 험한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린 제자들과 같이 외쳐야 한다. 주님, 죽게 되었습니다!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그동안 하나님과 무관하였을지라도, 혹은 믿는 이라도 심지어 천국의 비밀들에 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지라도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다고 느낀다면 외쳐야 한다. "제자들이 매우 두려워하며 성로 말하였다.


과연 이분께서 누구 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합니까? 마가복음 4:41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누구'이실까? 전혀 무관하신 분, 또는 예수님을 받는 사람들에 피해를 입어 그들이 믿는 예수란 이름이 싫고 거리껴졌던 분? 아니면 성경 말씀이 좋고 그 말씀을 믿었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그분이 누구 시기에?'의 체험이 더 깊고 높고 넓어지도록 때론 거센 바람과 풍랑을 보내시기도 하신다. 그러니 그런 풍랑이 오거들랑 주 예수님을 부르시길 권해드린다. 오, 주 예수님! 죽게 되었는데 돌보지 않으십니까? 오,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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