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네가 먹을 게 없지는 않을 거야
코로나 핑계를 댈 것도 없이 나는 원래 약속이 별로 없는 편이다. 삼십 년 된 제일 친한 친구와도 일 년에 서너 번 만나고, 회비까지 걷어가며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과도 대개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만난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요일마다 규칙적으로 얼굴을 보는 사람도 없고, 회사원이 아니다 보니 일로 얽혀 싫든 좋든 같이 술을 마셔야 하는 거래처 부장님도 없다. ‘지인’을 만나는 일은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 사교적이지 않을 뿐이지 외출하는 것 자체는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외출은 남편, 아이와 함께 한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집 앞 쇼핑몰에 마트부터 교보문고까지 다 있기 때문에 외출의 7할은 동네가 되고 만다. 붐비기 전에 얼른 갔다 오자, 한마디에 세 식구는 일사불란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남편은 그놈의 징글징글한 크록스, 나는 지푸라기를 엮은 것 같은 슬리퍼, 아이는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하얗고 까만 차들이 주차장 입구에 쭈욱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때 우리는 누가 봐도 쓰레기봉투 내놓으러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세일하는 티셔츠를 사고 아웃도어 매장에 진열된 펭귄 인형을 구경한다. 약 한 시간 가량 쇼핑을 하고 나면 우리 셋 다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메뉴인 해물짬뽕과 볶음밥을 곱빼기로 하나씩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채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우왕좌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비 채식인과 채식인 모두가 만족할만한 외식 패턴이 자리 잡혔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커피를 마시던 언니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며 말을 꺼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친구들 모임이 있어요. 그런데 그중 한 명이 비건이거든요. 문제는 그 친구 때문에 매번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다는 거예요. 늘 걔한테 메뉴를 맞춰야 해요. 비건 좋죠. 근데 그게 비건이 아닌 우리들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건 솔직히 짜증 나요.”
언니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나랑 점심 먹는 게 고민스럽고 짜증 난다는 뜻일까, 아니면 너도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니 적당히 알아서 잘하라는 얘기일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짧은 순간 긴 고민 끝에 내가 한 대답은, 언니 나 아무 식당이나 다 갈 수 있어. 언니 가고 싶은 데 있음 다 가도 되는데. 난 그저 그 안에서 내가 먹을 만한 음식을 찾으면 될 뿐이야,였다.
대체로 비건인 나는 대부분의 식당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옆 수학학원 선생님이 “우리 감자탕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묻기 전 까지는.
감자탕집은 삼선 짬뽕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중국 음식점이나 파인애플 볶음밥이 ‘나 여기 있어요~’하고 손을 흔드는 베트남 음식점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로지 돼지 등뼈를 주축으로 하는 탕과 찜 메뉴 외에는 어린이용 돈가스 메뉴 정도가 끝인 곳. 그건 조금 곤란하다. 선생님 저 고기 안 먹는데요, 하고 둘이 까르르 웃으며 그 순간은 어떻게 넘겼다 쳐도, 다음번에 피아노 선생님까지 합세해서 감자탕 이야기를 꺼내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방법이 없겠구나 싶다. 감자랑 우거지만 건져 먹는 것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나의 의지가 더 많은 사람에게도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만큼이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그들이 나를 위해 조금 더 메뉴가 다양한 식당을 찾아보듯 나 역시 그들을 위해 고기 육수에서 채소만 건져 먹는 일을 거북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근 시어머니가 집에 다녀가셨다. 요즘 들어 자꾸 몸이 아픈 며느리에게 보양식을 사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보양식이라고 해봤자 생각나는 메뉴는 온통 소고기, 닭고기뿐이었다. 그러다 남편이 죽은 소도 벌떡 일으킨다는 낙지를 떠올렸다. 그날 우리는 전복이 들어간 연포탕을 한 국자 씩 나누어 먹고, 갖은 채소와 함께 빨갛게 볶아진 낙지에 밥을 비벼 먹었다. 너 자꾸 아픈 게 고기 안 먹어서 기운 없어 그런 거 아니냐고 한소리 하실 법도 한데 잔소리 하나 없이 많이 먹고 기침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울지 모르는 고부관계 속에서도 채식이 존중된다면, 그보다 더 오래된 내 친구들은 조금 더 흔쾌히 비건 메뉴를 함께 해주지 않을까.
언젠가 볼 일이 있어 코엑스에 갔다가 생전 처음으로 비건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메뉴가 아주 다양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부와 가지, 토마토와 마늘을 가지고 이 정도의 식단을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면 지금 보다 훨씬 풍성한 식탁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이런 식당이 우리 동네에도 하나 있다면, 내 친구들도 한 번쯤 즐거운 마음으로 채식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도.
“교습소 그만두고, 식당을 해 볼까?”
남편에게 식당에서 찍은 음식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며 물었으나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식당을 운영할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는 사실을. 물론 돈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