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쓰는 일기
#1.
“부반장이 되면 맨날 행복한 일만 있는 줄 알았지. 첫날부터 시험을 망쳤어. 이럴 줄은 몰랐어. 나는 시험을 못 봤으니 부반장이 될 자격이 없어.”
단어 시험을 보다 말고 훌쩍거리기 시작한 4학년 어린이에게 화장지를 가져다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만하고 집에 갈까? 하고 물었더니 끝까지 다 하고 갈 거란다. 그럼 힘들면 얘기해줘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지로 눈을 꾹꾹 누른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돌아다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다가가서 말없이 어린이의 가방을 대신 싸 주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꺼내온 레모나 두 개를 어린이 손바닥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 이따 집에 가서 너 혼자만 먹어. 형아는 주지 마. 내일은 오늘보다 쉬워지게 선생님이 도와줄게. 어린이는 말없이 귀만 빨개진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다음 날 어린이는 일등으로 학원에 도착했다. 오십 분 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시험지를 내며 말했다. 저 백점이에요. 어린이가 돌아간 후에 채점을 해보니 정말로 백점이었다.
#2.
내 책상을 모션 데스크로 바꾼 첫날 어린이들은 신기하고 궁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교실에 성큼 들어오지 못하고, 교실 밖에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리키며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일주일 전 학원을 그만둔 중3 어린이가 생각났다. 초3에 만나 자그마치 6년을 함께 한 어린이다. 이제 고등학교 모의고사 문제지도 풀어주는 학원으로 옮겨보자고 했을 때 그 말 많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던 어린이. 그 어린이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너덜너덜한 제로니모 동화책을 들고 레벨테스트를 보러 왔던 첫 만남, 눈이 나빠져 갑자기 안경을 쓰게 됐는데 그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워서 내 눈은 보지 않고 땅만 보던 날, 스마트폰이 생겼다고 자랑하고 집에 가려는데 누군가 걸어온 전화에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하고 벨 소리가 울려서 다 함께 웃었던 날, 선생님 제 사촌동생이요~ 하길래 사촌동생 누구? 하고 물으면, 아이참~ 선생님 내 동생들 다 알면서~ 하던 날, 그래서 아~ OO이? 하고 물으면, 거 봐요 다 알면서~ 하고 웃던 날, 앞머리를 들춰야 체온을 재지 하면 쭈뼛거리는 목소리로 여드름 났단 말이에요 하고 싫어하던 날, 선생님 아까 밖에 첫눈 왔는데 보셨어요? 문 열자마자 외치는 목소리에 아 그래? 그럼 첫눈 기념으로 오분 일찍 끝내줄까? 해서 다른 어린이들까지 박수를 치게 만들었던 날.
그 숱하게 많은 소중한 순간을 함께 보낸 어린이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선생님한테 전화 오면 나 새 학원에서 진짜 열심히 공부한다고, 꼭 그렇게 말해줘, 그게 사실이니까 사실대로 꼭 말해줘!”
신신당부를 하고 학교에 갔단다. 딱 그 어린이 다워서 웃음이 났다.
#3.
“선생님은 죽고 싶었던 적이 있어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초5 어린이의 질문에, 선생님은 죽는 게 무서워서 죽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던 친구는 있었어, 라고 했더니 어린이의 눈가가 금방 촉촉해졌다. 그래서 그 친구한테 뭐라고 했어요? 하고 묻길래,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들이 슬퍼할 모습이 떠올라, 그게 너무 슬퍼서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너도 한 번 그 모습을 상상해볼래? 했지 하고 대답했더니, 맞아요, 내가 얼마나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데- 하며 어린이가 웃었다. 평소 그 어린이의 마음이나 생활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크게 걱정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특별했던 어린이에게 적당한 대답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며칠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행히 찰나의 고민처럼 그 순간은 잘 지나갔고, 어느새 어린이 이마에는 여드름이 나고, 촉촉했던 눈에는 아이라인 꼬리가 길게 그려질 만큼 자라게 되었다.
#4.
“그러면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잖아요.”
이다음에 네가 커서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한다면, 까지 말했을 뿐인데 앞에 앉은 초2 어린이가 코를 씰룩거리더니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적잖이 놀라고 당황해서 왜왜? 하고 물었더니, 나 어른돼서 결혼하기 싫어요, 그러면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고, 그러면 죽잖아요, 하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운다. 아 그러네, 선생님이 그 생각을 못했네, 그러면 우리 아빠 말 더 잘 들어서 아빠 최대한 안 늙게 할까?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그 어린이가 초6이 되어 남자 친구와 빼빼로를 주고받은 날, 아빠한테도 드렸어? 하고 물으니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고야. 결혼도 안 한다면서!
#5.
“선생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초3 어린이가 용기 내어 질문하자, 모든 아이들이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어,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나는 딱 한국 사람같이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이 나를 외국인으로 생각되게 했을까. 원어민만큼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6.
형편상 가볼 수 없는 학부모님들 대신, 학교 강당에 갔던 학예회 날. 팔이 후들거리도록 아이들 동영상을 찍었다. 그 날 오후 수업시간에 선생님 우리 반 하는 거 보셨어요? 저 몇 번째 줄에 있었게요? 하고 묻느라 큰 소란이 일었다. 너는 선생님이 보는 방향으로 왼쪽 끝에 두 번째 줄이었고, 너는 아까 까만 모자를 쓰고 나왔었고, 너희 반은 그 줄넘기 어려워 보이던데 잘하더라, 했더니 선생님이 진짜로 우리를 보러 왔네, 나는 뻥일 줄 알았는데 하고 감탄하던 어린이들. 그럼, 선생님이 간다고 했잖아, 동영상도 다 찍었는데? 했더니…
“헐! 선생님 그거 초상권 침해예요! 저는 허락 안 했는데요?”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는 어린이들.
#7.
오늘 급식은 뭐 나왔어? 디저트는 초코케이크 나왔고요, 고기랑, 김치랑 된장국이랑 나왔어요, 하길래 너는 된장국 좋아해? 선생님은 못 먹어, 그러면 휘둥그런 눈을 뜨고 어린이가 물어본다.
“정말요? 선생님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8.
“선생님 어제 우리 오빠 엄마한테 거짓말해서 혼났다요.”
그러면 너도 같이 조마조마하지 않았어? 이러다가 나도 같이 혼나면 어쩌지 하고? 물었더니, 아닌데요, 저는 좋은데요, 저는 오빠 혼나면 좋아요, 어차피 맨날 저 때리고 놀리거든요. 하고 갑자기 화가 난 목소리로 떠든다. 그러면 옆 자리에 앉은 어린이가 저도요, 저도 오빠가 혼나면 좋아요, 완전 고소해요, 하고 화를 내고, 그러면 또 그 옆에 앉은 어린이가 저도요, 아 진짜 맨날 저보고 돼지래요, 하고 화를 낸다.
“얘들아, 그게 다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아휴..”하고 초5 어린이가 말을 하면, 저 언니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일제히 째려보는 초3, 초4 어린이들. 말괄량이 동생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초5 어린이에게만 귓속말로 얘기한다. 하여간에 동생들은 언니 마음을 저렇게 몰라, 그치?, 하면 아무도 못 보게 나한테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간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너희 집에 숟가락 몇 개 인지도 다 알잖아~ 하고 말하면, 선생님 언제 우리 집 들어오셨었어요? 하고 되묻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사를 가거나 많이 커서 학원을 그만두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어린이들보다 먼저 울고, 그런 나를 보며 어린이들은 선생님 또 운다며, 원래 어른이 더 잘 운다고 시끌벅적 해진다. 김소영 선생님의 어린이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러워졌다. 나도 그렇게, 학교 시험 점수로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어린이들을 만나고 싶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어린이를 내려다 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 소파 방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