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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에 뜨는 별 Daystar Sep 03. 2020

78일간의 격리를 마치며...

‘코로나19’의 중심에 서서... 제발 이번이 끝이기를

“띠리리링 띠리리링”

“Hello(여보세요)?”

“Captain, where are you(기장, 지금 어디야)?”

“I am home. What’s up(나 집인데. 무슨 일이야)?”

“Government is shutting down the city. You have to stay home at least one week. So buy something you need right now(지금 시정부가 도시를 봉쇄하기 시작했어. 적어도 일주일은 집 밖에 못 나갈 거야.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서 필요한 거 사)…”

‘아 씨… 또 시작인가…… 지긋지긋하다 정말………’






2020년 1월

낮에는 바다를 즐기고, 밤에는 별을 즐기던 평범했던 어느 날이었다. 스케줄을 확인해보니 나의 예정된 비행이 전부 취소되어 있다. 내 비행뿐만 아니라 ‘우한’ 또는 그 근처 지역을 경유하는 회사의 비행 스케줄이 전부 취소다. 그리고 다음 날, 외국인 기장들은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회사의 복귀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무급 장기 휴가 공지가 있었다.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고 그렇게 갑자기, 나의 코로나19 여정은 시작되었다.






2020년 2월

한국은 비교적 평온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어두운 그림자는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일상을 잠식해갔고, 이제 더 이상 중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항공사들의 국제선 운영이 중단되기 시작했고, 주가지수는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쳤다. 마스크 구하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고, 학생들의 개학이 늦춰졌다.

나와 아내, 23개월 된 아들은 잠시 미국으로 몸을 옮기기로 했다. 그래도 지구 반대편이 여기보단 안전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2020년 3월

워싱턴주 시애틀 타코마. 파란 하늘과 넓은 바다.

‘코로나가 뭐예요? 지구 반대편엔 큰일이 났다면서요?’

미국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도시는 100% 정상 가동 중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전파 속도는 빨랐다. 뉴욕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서부 지역도 강타했다. 최초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제 이곳도 더 이상 안전한 지역이 아니었다. 한 달 남짓 미국 생활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또다시 급하게 짐을 쌌다. 다행히 한국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Dr. Jose Rizal Park’에서 내려다 본 시애틀 전경. 파란 하늘, 넓은 바다와 어우러진 도시가 인상적이다.






2020년 4월

한국에서의 시간은 마치 정지된 듯했다. 하루의 모든 시간을 집 안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의 처참함에 짓눌려 무너질 것만 같던 나의 연약한 마음은 25개월 된 아들이 일으켜 주었다.

‘그래… 코로나 덕에 좋은 일도 있구나. 코로나 아니었으면 내가 언제 이렇게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겠어…?’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부터 메일이 왔다. 중국은 이제 코로나19를 거의 회복한 단계이니 신속히 복귀하여 비행을 준비하라는… 그토록 기다렸던 ‘복귀 명령(?)’이지만 그저 기뻐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한국에 두고 나만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복귀 준비를 하고, 두 눈에 아이의 모습을 가득 담고, 아내와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20년 5월

외로움과 벗이 된 지 37일이 되었다. 37일간의 독방 격리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사회로 방생되었다. 세 번의 바이러스 검사, 먼지 가득한 구식 호텔, 냄새나는 화장실… 이곳 생활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도저히 적응이 안된다. 포기하면 편하다. 이곳에선 그것만이 살 길이다.






2020년 6월

드디어 비행을 다시 시작했다. 정기심을 타고, 복귀 훈련비행을 하고, 체크를 받고…

정확히 1년 전이다.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온 게. 1년 전 항공업계는 온통 장밋빛이었다. 몸집을 키워나갔고, 채용시장도 활발했다. 불과 1년 뒤의 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몸 담았던 회사의 동료들은 지금 투쟁 중이다. 부도덕한 오너 한 명으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직원들의 몫이다. 다행히(?) 한국을 떠나 이렇게 연명을 하는 나이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 너무… 무겁다.






2020년 7월

“띠리리링 띠리리링”

“Hello(여보세요)?”

“Captain, where are you(기장, 지금 어디야)?”

“I am home. What’s up(나 집인데. 무슨 일이야)?”

“Government is shutting down the city. You have to stay home at least one week. So buy something you need right now(지금 시정부가 도시를 봉쇄하기 시작했어. 적어도 일주일은 집 밖에 못 나갈 거야.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서 필요한 거 사)…”

도시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고, 격리는 다시 시작되었다. 달라진 건 저번엔 호텔(?)이라고 하는 독방이었고, 이번엔 집이라는 것.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2020년 8월 오늘

일주일이라던 격리는 끝도 없이 이어져 40일이 넘었다. 회사는 기장이 부족해졌는지 오늘 갑자기 날 구출해줬다. 회사 베이스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곳에서 비행을 준비한다.



2020년 중 78일은 오롯이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곰도 동굴에서 100일을 버티고 사람이 되었다는데, 나는 다시 곰이 될 모양이다.



코로나19의 중심에 서서 세상에 외친다.




혼자가 되어보니,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노라.

오직 나의 사랑하는 가족 밖에는…

사랑밖에 없었노라고…




중국에서 격리 첫날 밤. 덩그러이 놓인 침대가 나만큼이나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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