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꼰대거든요
타향살이란 쉽지 않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곳에선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되고, 그들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이곳 중국이란 나라에 정착한 지 오늘로 2년 반. 그동안 그들과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대부분(사실은 전부)은 내가 그들을 인정하고 지내왔다. 부딪히면 다치는 쪽은 언제나 내가 되는 이유로 ‘유구무언(有口無言)’ 했다. 하지만 어제는 정말 참기 어려웠다. 매번 목구멍까지만 차오르다가 증발해버렸던 울분이 잠시 흘러나왔다고 할까. 사실 울분이라 하기엔 사소한 일이지만, 이곳에서 체득한 나의 방어적인 태도는, 이젠 그런 사소함 조차 기념비적인 일이 되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1년 여름 어느 날. 중국 어느 공항.
비행기 외부 점검을 마치고 조종석에 들어왔다. 부기장이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평소 같으면 열심히 ‘FMC(Flight Management Computer : 비행 관리 컴퓨터)’ 비행준비 작업을 하고 있을 시간인데 무슨 영문인지 통화가 무척 길다. 통화를 마치면 이유를 묻기로 하고, 일단 내가 부기장 대신 FMC 작업을 시작했다.
‘띵동!’
사무장으로부터 콜이 왔다.
“Hello?(여보세요?)”
“Hello. Captain. This is purser. May we start boarding now?(기장님. 사무장입니다. 승객 탑승 시작해도 될까요?)”
“Ok. Start boarding.(네. 보딩 합시다.)”
몇 분이 지나고 승객들이 비행기에 도달했을 즈음, 부기장이 전화를 끊었다.
“Any problem?(무슨 일이야?)”
“Captain. I’ve left my I-Pad in the hotel room.(기장. 나 ‘아이패드’를 호텔방에 두고 왔어.)”
잠시 설명을 하자면, 이 ‘아이패드(EFB : Electric Flight Bag)’는 매우 중요하다. 조종사가 비행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비행에 필요한 이륙 절차, 착륙 절차, 공항 지도, 항로 지도, 각종 교범 등 모든 것들이 이 아이패드 하나에 다 들어있다. ‘EFB’라고 불리는 이 절차가 생기면서, 10kg 정도나 되는 두껍고 무거운 책들을 더 이상 비행마다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그럼 호텔에 전화해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래서 방금 전화를 했는데 호텔 직원이 공항까지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걸 누가 받아서 비행기까지 가져다 줄 지 모르겠어.”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호텔에도 우리 직원이 있고, 공항에도 우리 직원이 있는데 왜 그걸 못 가져온다는 거야…?’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기로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그냥 오늘은 수습 부기장 아이패드를 가지고 비행하면 될 것 같아.”
“What?!(뭐라고?!)”
화가 솟구친다. 나는 외국인 기장이기 때문에 회사 규정상 수습 부기장이 항상 조종석에 함께 타게 되어있는데, 지금 그 수습 부기장의 아이패드를 자기가 쓰겠다는 거다. 어이가 없다.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릴 것 같다.
‘야.. 너 진짜 뻔뻔하다. 네 아이패드를 어떻게든 가져올 생각을 해야지, 지금 남의 아이패드로 비행을 하겠다는 거야? 규정은 알고 하는 소리야? 가져올 사람이 없으면 네가 나가서라도 가져와야 할 거 아니야! 네가 그러고도 조종사야? 넌 전쟁 나면 다른 사람 총으로 싸울래? 그리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 비행이 장난이야???!!!’
소리쳤다. 물론 속으로.. 진짜로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늘 그랬듯이, 화는 속으로 삼키고 ‘내 아이패드’로 규정을 살펴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행에 필요한 아이패드 개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일단 다행이다. 적어도 당장 비행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미 승객들은 보딩을 마쳤다.
“너 비행 준비됐어?”
“응. 됐어.”
“뭐가 됐어? 너 항로 체크했어?”
“…… 안 했어.”
평소와 다르게 집요한 나의 모습에 부기장이 약간 당황한 기색이다. 이쯤에서 그만둘까 생각했지만 이날은 본능적으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안 했어? 그런데 무슨 비행준비가 됐다는 거야?”
부기장은 더 이상 말이 없다. 마치 별일도 아닌 걸로 내가 오버한다는 듯, 입을 꾹 닫고, FMC 버튼만 만지작 거린다. 최악이다. 비행안전에 침묵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수많은 항공사고들이 이 침묵 때문에 벌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조언하고, 최후에는 행동으로 도와주는 게 비행안전의 핵심이다. 모든 항공기에 최소 두 명의 조종사가 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혼자서는 비행할 수 없다. 부기장은 지금 침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기분 같아서는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을 내고 싶지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나는 기장이고 그럴 책임이 있다.
“너, 네가 잘못한 줄은 아냐?”
“응. 알아.”
“그런데 왜 미안하단 말을 안 하냐?”
“미안해. 기장.”
어라? 부기장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럴 땐 더 이상 밀어붙여선 안된다. 최대한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부드럽게 이 분위기를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비행에 집중할 수가 있다.
“좋아. 네가 인정했으니 딱 두 가지만 이야기할게.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기장으로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야.
첫째, 너는 아이패드를 두고 온 사실을 알았을 때 나한테 즉시 이야기하지 않았어. 너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 하지만 결국 시간만 지체되었고 해결하지 못했어. 우리는 팀이야. 나는 기장이고. 네가 만약에 좀 더 일찍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내가 직접 문제를 해결했을 거야. 그랬다면 좀 수월했겠지.
둘째, 우리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조종사야. 승객들은 우리를 믿고 돈을 지불했어. 돈을 받았으면 돈 값을 해야지. 그런데 너는 승객들이 비행기에 다 탈 때까지도 비행준비를 못했어. 돈은 받았지만 일은 안 한 거야. 변명할 수 있어?”
내 말이 끝나자 부기장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해. 기장. 기장 말이 맞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음부턴 잘할게.”
어라? 반성의 말에 진심이 묻어난다. 잘못을 인정하고, 다음엔 더 잘하겠다는 다짐까지. 오.. 역시 화를 내는 것보단 진심으로 조언하고,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역시 이번에도 나의 판단이 옳았어.. 흠..
성격의 측면에서 기장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를 유도하며 부기장을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어 일체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기장. 반대로, 유연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부기장이 자연스럽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관용적인 기장. 전자의 경우를 우리는 꼰대 기장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누구나 ‘나는 절대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꼰대와 관용의 경계에서 요동친다. 부기장을 믿고 비행하지만 때로는 부기장의 실수 하나가 그날의 비행을 망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점점 꼰대의 영역으로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면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앞서 말했듯이 ‘침묵’만큼 비행안전에 해로운 것은 없고, 꼰대 기장에겐 늘 ‘침묵’이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부기장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오늘도 다행히 꼰대와 관용의 경계에서 나 자신이 승리했다. 잠시나마 꼰대라는 달콤하고 쉬운 유혹에 넘어갈 뻔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나 기장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나.. 꼰대 되면 안 되는데… 초심을 잃지 말자. 오늘은 내가 분명히 너무 성급했어. 화를 낸 건 아니지만 성급했던 건 사실이야. 오락가락했던 내 기분을 부기장도 눈치챘겠지.. 다음부턴 좀 더 신중하자. 부기장들도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 나도 그랬잖아.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야. 다음부턴 한번 더 생각하고… 일단 참자..’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매번 하는 반성이지만 다음 비행에 나의 모습은 어떨지 확신이 없다. 그저 오늘 비행을 안전하게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뿐이다.
엔진을 껐다.
비행을 마치고 헤드셋을 정리하고 있는데 부기장이 이야기한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기장… 저기 있잖아.. 회사에는 보고 안 할 거지?”
‘아니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