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여행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
깊은 밤, 사람들은 온몸에 각각의 피곤함을 잔뜩 묻힌 채 모두 집으로 돌아갔나 보다. 사람과 차로 분주하던 거리를 이제 파도소리가 꽉 채우고 있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는 길고양이의 애끓는 세레나데처럼 비어있는 마음의 틈을 찾아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온다. 저 놈의 파도소리 때문에 오늘 밤도 잠을 쉬이 이루긴 힘들 것 같다.
지난밤늦도록 파도소리 가득한 텅 빈 거리를 바라보는 느긋함을 즐기느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그냥 바. 다. 였다. 그 외의 모든 일정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였다. 뭐 이제까지의 여행 스타일과 다를 바 하나 없는 내 멋대로 여행인 것이다.
두유 한잔에 구운 달걀 한알, 여행자의 소박한 밥상으로 딱 어울리는 구성이다.. 취사가 금지되어 있는 숙소이기에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었고 쓰레기도 거의 배출되지 않아 주인장의 방침에도 딱 어울리는 메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 잠깐 마주친 주인장은 혼자 여행 온 나에게 요가를 배우러 왔냐고 물었다. 인도도 아니고 갑자기 웬 요가?라는 호기심에 요가 배우는 곳이 있어요? 하니 숙소 바로 앞 건물이 유명한 요가원이라고 한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원데이 클래스나 단기 요가를 배우러 온다고 한다. 전혀 몰랐던 정보이어서 호기심이 순간 발동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제주 여행 때 원데이 요가 클래스에서 내 몸 활용서를 잘못 사용했던 처참한 기억이 떠올라 얼른 호기심을 잠재웠다.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또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아마도 주인장은 나이 지긋한 여자가 혼자 여행 왔다 하니 요가 배우러 온 줄 알았나 보다. 이제는 이렇게 혼자 여행을 다녀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길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내가 홀로 여행을 하며 떠 돌았던 40여 년 전에 비해 홀로 여행자의 인권? 은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예전에는 혼자 여행 왔다고 하면 일단 뿌연 의심의 필터를 끼고 쳐다보는 게 다반사였는데 지금은 정말 여행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4월의 바다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아이 같았다. 잔뜩 찌푸리며 제 성질대로 온갖 것들을 날려버릴 양으로 찧고 까불고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푸른 하늘 한 조각을 선물처럼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런 바다를 향해 ‘난 사춘기를 이기는 갱년기 아줌마라고~ 맘껏 까불어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이나 하나’ 하며 아줌마의 성깔을 보여줬다. 따뜻하고 안락한 카페에 숨어들어 훔쳐보듯 바다를 보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입 속에 모래 몇 알쯤 씹힌다고 당장 맹장염에 걸리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제법 성깔 있어 보이는 바다의 기세를 꺾고 나니 육체의 본능처럼 시장기가 몰려왔다. 숙소 주인장 추천의 몇몇 식당들을 돌아봤지만 일인메뉴 구성이 다 아쉽다. 대부분 이인이상 이란 단서를 메뉴판에 못 박아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곳 바닷가 마을까지 와서 파스타와 돈가스를 먹고 싶진 않았다. 회든 구이든 한때 바다에서의 삶을 영위했던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을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십만 원에 가까운 가격도 가격이지만 혼자 먹기엔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많은 고심 끝에 선정된 메뉴는 특선물회.
젊은 사장님의 친절한 추천으로 바다 향이 가득하면서도 혼자 먹기에 가격과 양이 아주 딱 제격인 음식이었다. 광어인지, 우럭인지 모를 생선회에 멍게, 해삼 그리고 특선이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복까지 그야말로 ‘얼씨구 여기가 바로 바다로구나’ 싶은 비주얼이 아주 맘에 쏙 들었다. 이런 좋은 음식에는 그에 걸맞은 술을 페어링 해야만 한다. 그럼 오늘의 술은 ‘기대하시라 두구두구두구~’ 바로 ‘청하’이다. 푸르고 맑은 물이란 뜻을 가진 청하는 바다를 앞에 두고 마시기에 딱 어울리는 술이었다.
술을 제법 즐길 줄 아는 나는 맛있는 음식과 잘 페어링 된 술을 본능처럼 찾아내곤 한다. 이십 대 여행 중에도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왠지 어른 눈 피해서 몰래 하는 나쁜 짓처럼 당당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혼자 하는 여행도 익숙지 않은 시대에 말간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편하게 봐주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나이가 드니 갓 쓰고 도포를 입든,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뭐든 당당하고 남 눈 의식하지 않고 뭐든 할 수 있어서 정말 자유롭다.
아주 맛있게, 그리고 제법 멋있게 잘 어울리는 음식과 술을 즐기는 저녁이 익어가는 시간들을 보는 것은 여행자의 소소한 행복이다. 기분 좋은 취기가 몰려오자 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을 만큼 흥이 오르는지 어깨가 들썩거렸다. 바닷길을 끼고 걷는 숙소로의 귀환길엔 콧노래와 가벼운 댄스가 끊이질 않았다.
행운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각각의 몫만큼 다 주어져 있다. 모두들 행운 통장 하나 만들어 차곡차곡 쟁여 놓다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세일러문의 요술봉처럼 마법의 주문을 걸어 꺼내 놓을 수 있다. 그 마법의 힘으로 고통도 이겨내고 슬픔도 극복하고 불안도 잠재울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난 마법의 세일러문 요술봉을 주로 여행할 때마다 꺼내 쓰는 사람이다. 매번 특별한 계획도 기대도 없이 떠나는 여행에서 항상 투자대비 수익이 극대화된 결과물을 얻는 것 보면 투자실력이 출중한 건지 행운의 힘이 강력한 건지 어쨌든 참 운이 좋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풍경은 이렇다.
인적 드문 바닷가, 하늘과 맞닿은 바다는 서로의 경계를 거부할 만큼 짙푸름 이란 색깔을 자랑하고 있다. 그 풍경 한 구석에 차를 세워 놓고 음질 좋은 블루투스로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이번 여행의 감상을 소소히 써 내려가고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고 원치 않는 소음도 없으며 도시에서는 제일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운 주차비 걱정도 없다. 내가 머물 만큼 얼마든지 머물다 가라는 바다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맘껏 바다의 호사를 누리면 될 뿐이다. 따뜻한 행복감과 즐거운 자유로움이 나를 휘어 감고 있다. 절대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