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달콤한 탈출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제 탈출해야만 한다. 요즘 감시의 눈이 느슨해진 것도 탈출의 적절한 시기가 왔다는 증거이다. 더 이상 미루거나 거부할 수 없다. 난 고개 너머 외딴 성에 갇힌 가여운 공주이다. 하루하루 탈출의 날을 기다려왔지만 이제 더 이상 백마 탄 왕자의 구출을 기다릴 순 없다. 스스로 이 성의 담을 넘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퇴사의 보상은 제법 달콤했다. 아침마다 지옥철이라 불리는 숨 막히는 1호선에 올라타야 하는 경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고, 불만 끄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내 몸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와 밤새 혈투 같은 숨바꼭질 놀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끼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과, 무엇보다 매 순간 바쁘지 않아도 되는 시골의 느린 시간표는 나를 예전의 느긋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름다울 것만 같은 전원생활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떠나고 싶을 때 떠나지 못한다는 거였다. 대학을 진학하며 집을 떠난 후 튼튼한 두 발로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냐 하는 정신으로 떠나고 싶을 때마다, 가고 싶은 곳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부터 그 역마살에 강한 제동이 걸렸다. 그건 당연히 아버지의 감시와 여행금지령이었다. 사실 딸이 그렇게 홀로 떠돌아다니는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모님이기에 금지령이라기보다는 홀로 여행 불가령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유난히 막내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아버지였기에 당신 곁에 두고 매일 얼굴 보고 지내는 그 시간들을 꽤나 흡족하게 여기셨다. 쉽지 않은 조기 취업에도 아버지는 썩 달가워하지 않으셨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왔을 땐 전혀 아쉬워하지 않고 누구보다 반겨주셨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한동안은 기대에 부응하는 표정과 행동으로 제법 사랑받는 딸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살던 곳이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었는데 마치 붉은 괴물이 감시하는 성에 갇힌 가련한 공주라도 된 것 같은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떠날 수 없음’에서 오는 병이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의 한 날, 꿈꾸기만 했던 탈출을 감행했다. 백마는 아니지만 마당 한 구석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힘껏 페달을 밟았다. 늘 차를 타고 가던, 제법 높고 긴 고갯길을 자전거로 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 올랐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빨리 저 붉은 괴물의 눈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어 나오고 다리도 힘이 풀리는지 페달을 밟는 속도가 자꾸 느려졌다. 그제야 한숨 돌리며 뒤를 바라보았다. 탈출을 눈치챈 감시병의 모습도 붉은 괴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작전 성공! 이제 더 이상 가련한 공주가 아닌 자유로운 방랑자로 완벽한 신분세탁을 했다.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한적한 시골의 도로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자전거를 세우고 소리의 흔적을 따라가보니 풀숲에 가려진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나기’의 한 장면 같은 징검다리까지. 신발을 벗고 개울에 발을 담갔다. 맑은 물이 발목을 감싸자 그동안 눌러왔던 답답함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서늘했고 모든 것이 내 편이 되어 주는 오후였다. 그 긴박한 탈출의 순간에도 챙겨 온 사과 한 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아삭한 소리와 함께 사과즙이 입안 가득 번졌다. 그 맛은 단순히 새콤, 달콤함이 아니었다. 가을의 빛과 바람, 그리고 나만의 자유가 한꺼번에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그날의 사과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탈출이었고 작은 반란이었다. 가끔 사과향을 맡으면 그날의 오후가 떠 오른다. 발목을 스치던 작은 물살, 바람에 나부끼던 풀잎 그리고 하늘을 한껏 올려다보던 나의 얼굴까지. 지금도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되살아나 여전히 나를 길 위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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