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질문으로 떠오르는 그 순간
오랜만에 다시 홀로 여행길에 오른 어느 날이었다. 역으로 진입하는 기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걸 느끼며 다급하게 외쳤다.
“싫어요. 나는 누구와도 같이 다닐 계획이 없어요. 지금처럼 계속 억지 부리면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예요. 그만하세요.”
그제야 남자는 살짝 얼굴을 굳히고 말문을 닫았다. 내 굳어 있는 얼굴과 주변 승객들의 눈치를 살피는 듯 보였다. 몇 분 뒤, 기차가 정차 하자 그는 조용히 가방을 끌어당기고, 터덜터덜 힘없이 기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에 내려서도 그는 내가 탄 기차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 같았다. 언뜻 창 밖으로 보이는 얼굴엔 아쉬움인 듯 미련인 듯 한 표정이 스쳤다.
불과 10분 전만 해도 나는 아주 평온한 마음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 풍경이 조금씩 흘러가기 시작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좌석 사이를 가로지르며 여행자의 마음 사이사이까지 넘나드는 느긋한 시간이었다. 떠남에 대한 설렘과 홀로 여행의 자유로움이 주는 적당한 긴장감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잠깐 눈을 감고 있는데 낯설고 부산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떠 보니 비어있던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다른 자리가 많이 비어 있음에도 굳이 앞자리에 앉은 그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학생 같지 않은 차림에, 지쳐 보이는 얼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앉자마자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창밖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유로운 기차 여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가요?”
‘음, 목적지를 말해줘야 하나? 그러기 싫은데…’ 그렇다고 바로 눈앞에서 말을 거는 사람의 질문을 무시하기도 좀 미안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하며 난처한 상황인데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속사포처럼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냈다.
“혼자여행이라도 하는 거예요?”
“이름은 뭐예요?”
“학생이세요?”
“왜 혼자 다니는 거예요?”
“남자친구랑 싸웠어요?”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는 내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진 호기심과 궁금함을 질문이라는 형식을 빌어 마구 쏘아댔다. 어찌 보면 마치 나를 오랜 친구처럼 대하려는 억지스러운 친근함이 묻어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혼자 여행하는 중이에요”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점점 경계를 넘어왔다.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나도 혼자예요. 그러니까 우리 둘이 같이 다니면 되겠네요.” 나는 웃음기 싹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혼자 있는 게 좋아서 혼자 여행을 온 거예요. 같이 다닐 생각은 없어요.”
그는 머쓱한 듯 고개를 긁적였지만, 지금 본인이 꼭 떠나야 하는 이유가 천만 가지나 되는 것처럼 간절히 동행을 요구했다. 얼마나 절절하게 부탁을 하는지 순간 ‘같이 떠나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칠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정말로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가 떠난 후 콩닥거리던 마음을 진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홀로 여행한다는 것은 많은 선택과 결정을 오롯이 혼자서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날의 나는 단호한 거절을 선택했고, “만약 그가…”로 시작하는 온갖 상황을 되돌려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이후로도 그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따금 그 순간이 떠오르면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가 자리 잡은 듯했다.
그가 무례했던 것인가, 내가 무례했던 것인가.
생각은 기차의 이 칸 저 칸을 오간다. 3호차에는 억지를 부리는 그가 버티고 있고, 4호차에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내가 웅크리고 있다. 9호차쯤엔 해맑게 우연한 동행자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한 남자가 있고, 12호차엔 불호에 가까운 그의 외모에 마음을 닫아버린 여자가 있다. 기차 한량을 가득 채울 만큼 다양한 그와 내가 칸마다 ,좌석마다 앉아있고, 역마다 내리고 또 탑승하기를 반복한다.
분명한 것은 그날의 나는 인생의 1호차에 있었다는 것이다. 홀로 여행을 배워가는 20살의 여행자. 이제 막 혼자여서 외롭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혼자여서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