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남은 크레이지 러브

그 남자의 미친 사랑이야기

그날도 바다를 찾았다. 바다를 마주하고 싶었다.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그냥 바다에게 풀어놓고 싶었다. 커다랗고 끝없는 바다 앞에 서면 갈등과 미움과 자기 연민마저도 부서지는 포말처럼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바다를 향해 가는 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꾸 마주치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뒷모습에 진득하게 묻어나는 고독함에 잠시 마음이 쓰였지만 ‘누군가 또 외로운 영혼이 있나 보다’ 하며 애써 무심함으로 흘려보냈다



조금씩 바다 내음이 코끝에 전해오자 몸도 마음도 취한 듯 바다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어느새 바닷가 한쪽에 앉아 끝없이 몰려드는 파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고요 속에 천둥 같은 포효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바다,

그 거대한 끝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바다,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려 했지만

그저 귀를 열고 몰려드는 바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바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무슨 아픔을 이곳에 던져두고 싶었는지, 젊음이란 아픈 축복을 살아 내고 있는 여행자의 가슴엔 언제나 묵직한 돌들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막상 바다 앞에 서자 이곳까지 끌고 온 아픈 사연도 바닷바람 앞에서는 희미해질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자그락 자갈 밟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그 남자였다.

허락도 받지 않고 옆자리에 무너지듯 풀썩 앉아 버린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바다에 던져 놓듯 풀어놓는 남자의 사랑이야기.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단다.

그 사랑 안에서 행복했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었단다.

하지만 영원을 노래하며 속삭였던 사랑의 밀어들은 한낱 가벼운 먼지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단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인과, 오랜 세월 깊은 우정을 쌓아 온 남자의 친구는 그렇게 남자에게 배신이란 단어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단다.

그리고 오늘이 그 둘의 결혼식이란다.’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아프게, 아프게 이어 나갔다.

그리고 파도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크레이지 러브( 폴 앵카의 노래)



‘미친듯한 사랑. 그건 미친듯한 사랑이라오.

그렇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미친듯한 사랑인 줄을 알면서도.



미친듯한 사랑. 정녕 미친듯한 사랑이라오.

당신만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한.

오! 나의 미친듯한 사랑이라오.’




남자의 사랑이 미친 걸까?

남자를 배신한 여자의 사랑이 미친 걸까?

노래만큼 파도소리도 아팠다.


그가 들려준 아픈 사랑이야기도, 미친듯한 사랑 노래도 바다 앞에서는 다 허락되었다. 사랑은 바다와 닮았다.

파도처럼 달려들어 가슴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이내 밀려나며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바다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듯 사랑도 알 수 없는 심연을 품고 있다.

때로는 품어주는 듯 다가오지만, 결국 두 손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끊임없이 다가왔다가 멀어져 간다. 사람도 그렇다. 내 삶에도 많은 이들이 다가왔다가 언젠가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 갔다. 그때마다 가슴 아파하고 무너져내리는 나는 방어막이 너무 연약했다. 그러나 이제 안다. 사랑도 결국 사람의 일이라 때로는 우리를 삼키기도, 때로는 훌훌 털고 일어서게도 한다. 지금도 파도는 여전히 다가왔다가 멀어져 간다. 나도 그 안에서 잠시 흔들리다 다시 고요해진다. 사랑도, 삶도 그렇게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아픈 기억들을 바다에 맡겨두려 이곳에 찾아왔듯이 그 남자의 노래와 눈물도 바다에 던져진 것이다. 남자의 미친듯한 사랑을 바다는 어떤 연민도 비난도 없이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끝없이 다가왔다 사라지는 파도에 실려 조금씩, 조금씩 아픈 사랑의 기억도 사라져 갈 것이다.


바다는 오늘도 말없이 일러준다. 사랑이 끝나도 삶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