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

그게 뭐냐? 좋아 보인다.”
“아, 이거 캐리어잖아. 엄마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전에 내가 줬잖아. 기억 안 나?”
“그런 걸 줬다고?”
“응, 엄마가 색깔이 예쁘다고 어디 갈 때마다 항상 내가 준 캐리어 끌고 다녔는데 생각이 안 난다고?”

엄마의 기억이 사라져 간다.
내 작은 캐리어를 맘에 들어하시기에 새로 하나 사드리겠다니 굳이 다른 것보다 그게 마음에 든다고 꼭 집어 말씀하셨던 엄마. 어디를 가시든 캐리어와 함께 하셨던 엄마인데 이제 그 쓰임새도 이름도 기억에서 사라졌나 보다.
가슴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엄마, 이 가방 이름이 뭐라고?”
“아, 뭐였지? 또 까먹었네.”
“엄마, 캐리어야 캐리어. 캐나다 할 때 ‘캐’ 리어카 할 때 ‘리어’ 합해서 캐리어”
“그래, 캐리어 맞네.”
이삼 분 뒤 “ 엄마, 얘 이름이 뭐라고?”라고 물으면
“리어카.”라고 자신 있게 외친다.
막내딸 집에 오셨다가 다시 모셔다 드리는 세 시간의 여정동안 끊임없이 ‘캐리어’란 단어를 다시 알려드렸지만 당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엄마는 결국 캐리어를 본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두려워졌다. 이러다 엄마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지면 어쩌지? 아니 당신의 존재조차 떠올리지 못하면 그때는, 그때는…..

그 두려움의 끝에 떠오른 오래된 기억 하나.
‘ 언젠가 이 여행 이야기들을 써봐야겠어. 그리고 책으로 만들어봐야지.’
하지만 그 다짐을 현실로 끌어오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번 그럴듯한 핑계도 늘어났다. 일이 바빴고, 사는 것이 일단 더 중요했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야 했고,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핑계는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작가의 고유영역이니까.
그러다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들 속에서 혼돈을 겪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억이 영원히 가슴속에 머무를 수 있다고 누가 장담을 할 수 있겠는가.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19살에 시작된 홀로 여행.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었고 학생이 카메라를 가지고 다닐 만큼 여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앨범을 뒤져봐도 홀로 여행을 하며 찍은 또는 찍힌 사진 한 장 없다. 그래도 이곳저곳 떠 돌며 제법 끄적거렸던 노트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마다 12월 마지막 날에 일기처럼 써 둔 대학노트를 모조리 태워버리는 의식으로 한 해 마무리를 하던 젊은 날의 어리석은 치기 덕분이다.

그러니 40년 전의 하루하루는 오로지 기억과 추억 속에서만 재생되어야 했다. 작은 실마리와 조각 증거품 하나만을 가지고 사실을 밝혀내야 하는 탐정처럼 온몸의 세포들이 40년 전의 냄새와 소리와 그림자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 속에 묻혀 있던 나의 길들을 하나씩 불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래된 풍경들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그날의 바람 냄새, 나를 스치던 노래, 누군가의 웃음소리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마치 오래된 필름이 다시 돌아가듯, 잊힌 기억들이 조용히 빛을 되찾는 순간들이었다. 먼지 묻은 필름 속에서 되살아난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렇게 하나둘씩 써 내려간 이 글은 어쩌면 엄마에게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엄마는 한 번씩 물어보는 내 어린 날의 풍경을,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내 슬픔은 두려움의 색깔로 변하곤 했다. 어쩌면 나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더 쓰고 싶어졌다. 엄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막내딸의 ‘청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지금 너희들이 겪는 아픔과 고민을 엄마도 똑같이 느꼈고 끝없이 방황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으려 쓴 글이지만 돌아보면 이 글 덕분에 오히려 살아 있는 나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불을 켜는 일’ 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안다.
기억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지만 길 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남겨 준 ‘사랑과 인연’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길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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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