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여행 갔을 때요? 일단 엄마가 친절해지고 뭐든 다 응 그래, 하니까 아기가 되죠.
-세 살 땐가 둘이 KTX 타고 부산으로 1박 2일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시티 투어 버스로 구경 다녔고, 볕이 뜨거워 우산으로 가려 주고. 추파춥스 하나 입에 물려 주고. 바다를 처음 보고 무서워하길래 품에 안고 바닷물에 발 담그니 조금씩 마음이 풀려서 나중엔 아이가 맨발로 모래사장에 들어가 모래놀이하고 그랬죠. 가끔씩 그때 얘길 했어요. 엄마랑 또 단 둘이 여행 가고 싶다고. 부산이든 어디든 좋다고요.
-주말에 가족들과 호텔에서 쉬고 왔다는 친구들도 있다면서 호캉스 얘기도 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고, 배달 음식 시켜 먹으면서 한 이틀 객실에서 안 나오고 엄마랑 있고 싶다고요. 그러면 학교 갈 수도 있을 거 같다고요.
-왜 안 가셨어요? 아이가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데요. 저라면 달러 빚을 내서라도 가겠어요. 학교 안 보내고 여행만 다니겠어요.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했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들에 매여 있어서 시간이 없었어요. 이젠 올해 일, 거의 다 마무리됐으니 가 볼까 싶어요.
-꼭 다녀오세요. 가시거든 따님과 최대한 나른하고, 편안하고, 유치하고, 달달하고, 게으른 시간을 보내세요.
지난 월요일 나의 세 번째 상담에서였다. 상담 선생님은, 우리 애는 불안정한 애착 관계에 사랑을 넘치게 부으면 이제 재미없다고 젖병 던지고 밖으로 나갈 아이라고 했다. 지금은 애정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 쉬지 않고 채워 줘야 한다고 했다. 호캉스나 여행 이야기는 이미 몇 차례 남편에게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다녀오라고 했고 나는 다녀온다고 뭐가 달라질지 모르겠다고 했다. 돌아와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런데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한 본질은 학교가 어렵고, 또래가 어렵고. 그래서 밖에 나가기 싫다는 거였으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아이에게 자신을 지지해 주는 경험이 적어서 이렇게 힘들다는 거였다. 나는 다음 날 저녁, 아이에게 호캉스를 가자고 했다. 정말?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엄마 돈 괜찮겠어? 응 그 정도는 있어.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아이와 남편과 셋이서 밤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남편이 욕실에서 나를 급히 불렀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졌대.
-어?
비현실적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사이,
-6시 이후 외출 불가래. 안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남편의 말에 불안이 확 올라왔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와 뭐라고 아이에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윽고 안방에 들어가 아이 앞에 앉았다.
-내일 호캉스. 좀 미루면 안 될까?
-왜애?! 가기로 했잖아요.
-계엄이 선포됐데.
-계엄? 1학기 사회 교과서에 나온 거?
-응.
-전쟁 나? 그럼 이제 군인들이 시민들한테 총 쏘는 거야? 엄마 나 살고 싶어. 죽기 싫어. 엄마 나 무서워.
-울지 마. 괜찮을 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지금이 어느 시댄데. 걱정 말고 자. 엄마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게. 호캉스는 상황 봐서 내일 아침에 예약해도 되니까 안심하고 자.
-진짜 아무 일 없겠지?
-응. 어서 자자.
아이를 재우고 노트북을 켰다. 몇 시간을 넘긴 마감을 하려고 문서들을 불러들였다. 캡처를 하고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타이핑하는데 자꾸 오타가 났다. 진정되지 않았다. 유튜브를 열었다. 헤드셋을 쓰고 국회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채널을 클릭했다. 흰 연기가 자욱한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완전무장한 군인들과 바리케이트를 친 의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더 볼 자신이 없었다. 유튜브 창을 작업 표시줄 아래로 내리고 계속해서 일에 집중하려고 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새벽 1시 1분. 극적으로 비상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는 속보가 나왔다. 패널들은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1시 45분쯤 남편이 방문을 열었다.
-왜 안 자?
-일이 아직 남아서.
-비상 계엄 해제안 통과됐데.
-응 들었어. 천만다행이야.
-정말.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자. 몸 상해.
-응. 당신도. 잘 자.
계속해서 타이핑을 했다.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졌다. 눈물이 났다. 제발. 제발. 제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암담했다.
새벽 4시 26분. 대통령실에서 계엄 해제를 발표했다는 속보와 4시 30분. 국무회의 의결로 계엄 해제가 선포되었다는 속보가 떴다. 하....... 그제야 위경련이 잦아들었다. 자꾸 신트림이 올라왔다. 4시 45분. 파일들을 구글 드라이브에 올리고 단톡방에 공유했다.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6시 30분. 일어나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쳤다. 냉장고에서 당근, 양파, 애호박을 꺼내 볶음밥을 만들고 있는데 남편이 작은방에서 나왔다.
-밤새웠어?
-아니. 1시간쯤 잤나.계엄 해제 선포까지 듣고.
-어이쿠야.
-이따 시간 날 때 호텔 좀 예약해 줘.
-괜찮겠지?
-계엄 해제됐는데 당장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렇겠지? 알았어.
수요일. 오후 3시 40분. 집과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짐을 풀고 창밖으로 공원을 내려다봤다. 아이와 침대에 누워 어릴 때 얘기를 하다가, 소파에 앉아 집에서 싸 온 과자와 귤을 먹으며 소리 내 웃었다. 간식을 다 먹고 컬러링북을 꺼내 색칠을 했다. 편안한 재즈를 태블릿으로 플레이하자 아이가 내 무릎에 누웠다.
-엄마. 너무 좋은데 조금 심심해. 집에서 놀잇감을 안 챙겨와서. 시내에 나가서 놀거리 좀 사다 주면 안 돼요?
-어떤 걸로?
-공주 왕관놀이 세트랑 병원놀이 세트. 엄마랑 그거로 유치하게 놀고 싶어요.
-응 알았어. 근데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네. 핸드폰 보고 있으면 돼요. 편의점에서 콜라도.
-오케이. 후딱 다녀올게. 조금만 기다려.
아이는 내게 왕관을 씌우고 여왕봉을 손에 쥐여 주었다. 엄마 여기 봐.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아빠한테 보내 줘야지. 뭐라고 보낼까요? 음. 미세스 수원 진? 이리로 시집왔으니 서울 진인가. 아이가 피식 웃었다. 사진을 전송하자 환자분, 침대에 누워 보세요 했다. 이제는 꽂을 수 없이 짧아진 장난감 청진기를 두 귀에 덜렁거리며 나를 진찰했다. 체온을 재고, 주사를 맞히고, 약을 바르고, 먹을 약을 주고, 병원비를 계산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날아갈듯 밝고 높았다.
함께하지 못해 알 수 없었던, 아이의 숱하게 외로운 시간들이 까마득했다. 그 어둠이 희미해지기를 조용히 빌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