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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by 어슴푸레

2025년 4월 16일.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한 달 좀 못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전에 드린 메시지에 '1' 표시가 사라지지 않고 있던 터였다. 아……. 제발. 선생님. 제발요. 저는 아직…….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안내 멘트가 나오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공원을 돌면서 빌었다. 이 예감이 잘못된 것이기를. 가족들과 여행을 가신 것이기를. 애써 믿었다.


2025년 5월 13일. 스승의 날을 앞두고 있었다. 여전히 톡 화면의 '1'은 사라지지 않았고 선생님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15일도 마찬가지였다. 매해 이 즈음이면 선생님 댁으로 꽃바구니를 보냈으나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3년 전. 욕실에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퇴원하신 때도 3월이었다. 사모님의 번호를 알지 못했고 선생님 댁 아파트 현관에서 속수무책 카네이션이 시드는 것을 상상하는 게 두려웠다. 행여 그것이 어떤 상징이 될까 꽃을 보내지 못했다.


2025년 4월 25일. 서촌에서 경신 샘과 술을 한잔했다. 내게 얼마나 특별한 분인지 알기에 경신 샘은 조찬용 선생님은 잘 계시냐고 물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톡을 읽지 않으신다고.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선생님은 내게 정서적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고. 언젠가 선생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2025년 5월 18일 오전 8시 40분.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설마. 아닐 거야. 선생님은 내게 문자를 보내신 적이 없었다. 늘 톡으로 아침 인사와, 20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일월 저수지의 사진과,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와, 브런치 글에 대한 감상을 전하셨었다. 선생님 이름을 누르니 검은 리본을 단 '부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심장이 요동쳤다. 작은방에 가서 남편을 깨웠다. 여보. 수원 가 봐야 할 것 같아. 선생님 돌아가셨어.


2024년 10월 23일. 선생님을 뵈러 화서역에 내렸다. 2년 만이었다. 댁 근처에서 갈비 정식을 사 주셨다. 결제하려고 꺼낸 카드를 막으시며 여긴 내 바운더리야. 선생님이 산다. 짧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커피를 마시고 억새와 들꽃과 국화가 지천인 일월 수목원을 함께 걸었다. 중절모를 쓴 선생님은 어쩐지 연로해 보였다. 마주 잡은 손이 차가웠다. 손끝에 혈관이 다 죽어서 얼음장처럼 차다고. 사과식초를 물에 타서 꾸준히 먹으니 좀 나아졌다며 너도 손이 차다 한번 마셔봐 하셨다.


-이제 비워야 할 나이인데 그게 잘 안된다. 네 나이는 비우는 게 아니라 채울 때지.

-선생님은 시나 시집을 생각하며 주변을 넓히지 않고 내면의 저변을 넓혔는데. 어쩌면 내 스스로 하는 위로, 위안일지 모르지. 그런데 이쪽과 저쪽의 무게를 재 보면 아마 똑같을지도 몰라.

-나는 아프면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 없어. 짧게라도 좋으니 정신 멀쩡할 때 가고 싶어.


서울로 돌아오면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메모장에 적었다. 나는 그날이 선생님을 뵙는 마지막이 될지 몰랐다. 그 무렵 아이의 우울증이 정점을 향해 가는 중이었고. 선생님 실은요. 아이 얘기를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선생님이 걱정하실 것보다 선생님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용기가 없었다. 내년 봄이면 좀 나아지겠지. 그땐 꼭 끔찍이도 예뻐하시는 딸애와 같이 와야지. 일월 공원도 걷고. 저수지도 걸어야지. 선생님 양팔을 아이랑 한쪽씩 끼며 느릿느릿 걸어야지 했다.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됐다. 올해도 건강하라고 톡에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3월이 왔고 선생님께선 어김없이 행복을 가득 담아 봄 향기를 전하셨다. 그러던 2025년 3월 19일. 선생님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드려야 할 말씀을 선생님께서 먼저 하셨다. 내일도 이어질 일상일 줄 알았다. 아이의 자퇴 문제가 끝나지 않고 있었기에 길게 답하지 못했다. 한 시간이 훌쩍 넘어 감사하다는 이모티콘을 무성의하게 보냈다.


장례식장에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선영 씨. 선생님이 선영 씨는 꼭 보고 가셔야 할 것 같아서. 애들더러 전화기 켜서 선영 씨한테 연락하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정말 아꼈는데. 정말 예뻐했는데. 웬만한 가족보다 가까웠는데. 일흔둘에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은. 3월 19일에 쓰러지셔서 집에서 누워만 계시다가 5월 7일에 한 번 더 응급실 가셨고. 토요일에 주무시다 가셨어요.


3월 19일. 내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내신 그 날. 바로 그날 쓰러지셨다는 말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금요일까지 친구들, 집에 놀러와서 정신 맑게 잘 노셨다고. 꽃을 보낼 걸 그랬어요. 선생님, 댁에 계신 줄 몰랐어요. 병원에 계신 줄 알았어요. 꽃을 보냈어야 했어요.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저는. 사모님이 흐느끼는 나를 달래며 어깨를 쓸었다. 마음 편히 가져요. 정말 잘했어. 그동안. 이제 부담 내려놓아요. 정말 고마워요.


빈소의 영정을 보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떨어졌다. 선생님 저 왔어요. 선생님 선영이 왔어요. 선생님. 향을 꽂고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상주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사모님을 안고 울음을 삼켰다. 접객실로 가서 아무 말 없이 육개장을 먹었다. 남편의 눈도 붉어져 있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휴대폰을 열어 일월 수목원을 검색해 남편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들렀다 서울 가자. 선생님 추모하고 가고 싶어.


2025년 5월 18일. 수목원에서는 모네일월전을 하고 있었다. 일전에 선생님께선 한차례 모네의 그림을 톡으로 한 보따리 보내 주셨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선생님이 보였다. 온실 밖으로 나왔다. 분수대를 지나 전통 정원을 지나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나무 테크의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길게 이어졌다. 짙어지는 녹음과 반짝이는 윤슬이 처연히 아름다웠다.


차를 타기 전에 남편에게 말했다. 저수지 보이게 사진 한 장 찍어 줘. 시계탑의 시계가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5시에 입관을 한다고 했다.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이 걸으셨던 길들이, 선생님이 눈을 주었던 꽃들이, 선생님이 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던 오리들이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웠다. 몸을 돌려 선생님이 사시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사진을 찍고 휴대폰을 닫았다.


달리는 차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송원여중 길을 지나자 선생님이 예전에 사셨던 동신 아파트가 멀찍이 보였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수원은 너무나 크고 이상했다. 마치 평행 이론처럼 인큐베이터에서 새 삶을 시작한 성빈센트 병원에서 선생님은 생을 마감하고 계셨다.


2025년 5월 19일.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죄송했던 일들만 떠올랐다. 마음에서 놓아주지 않으면 좋은 곳으로 못 가신다는데. 나는 선생님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선생님과 주고받았던 톡들과 31년 전 선생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으로 부쳐 주셨던 편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톡 창을 열었다. 친구 목록에서 선생님 이름이 깜빡거렸다. 아드님이었다. 바람 잘 들고 볕 따뜻한 변산 선영에 잘 모셨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평생 편찮으셨는데 거기서는 훨훨 자유로우시려나. 이제는 진정한 빠삐용이 되셨으려나. 사진 속 웃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선영아. 잘 있지야.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선생님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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