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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Dec 19. 2020

집사람의 이별 통보

기어이 올 것이 왔군요

     

학생들을 하교시킨 후 한숨 돌리며 커피를 내리던 중이었어요. 교무실 가득 퍼지는 커피 향기를 느끼며 핸드폰을 보니 반갑지 않은 카톡이 와 있었습니다. 반갑지 않다는 말은 솔직하지 못하군요. 네, 올 것이 왔구나, 두려움과 걱정을 왈칵 끼얹는 집사람의 이별 통보였습니다. 커피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요.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잔을 쥐고 온기를 느꼈어요. 몇 모금을 마시고는 진심을 담아 커피한테 인사했어요. “고마워, 늘 이렇게 위로해 줘서. 덕분에 쓰지 않구나, 마음도 인생도.”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어요. 어차피 저와 집사람은 처음부터 1년이라는 시간을 약속했거든요. 네, 덕분에 오랜 시간, 틈틈이, 이별 이후를 생각해 보고는 했어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이별을 연습했지만 사실 시간이 좀 더디 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란 게 어디 저마다의 사정을 헤아려주나요. 아랑곳하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거나, 애타는 줄 알면서도 세월아 네월아 뒤처져 오거나죠. 지금도 기어이 그날을 제 앞에 데려다 놓을 작정인가 봅니다. 벌써 12월도 셋째 주에 접어들었어요. “퍽도 고맙다. 이 얄궂은 녀석아. 덕분에 씁쓸하구나, 마음도 인생도.”     




사람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참 특별하고 의미 있었습니다. 그건 아내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저희 둘 다 전에 없던 경험을 하며 많은 것을 느꼈으니까요. 그렇지만 단언컨대 아내보다 제가 더 행복했을 겁니다. 살아보니 사람들이 다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왜 하는지 알겠더군요. 아내가 있고 없고는 빛과 빚(더미)의 차이예요. 박노해 시인은 아내의 옛말인 ‘안해’를 ‘내 안에 떠 있는 밝은 해’라고 말씀하셨죠. 정말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저를 밝혀주고 제게 온기를 주는 사람이 맞습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왠지 모를 힘이 나는 것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전등 불빛과 일상의 소음에서 잔잔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내 덕분이죠.      


사람도 자신의 역할에서 작은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싱크대와 냉장고를 정리한 후, 양념이나 식재료마다 라벨링을 하고는 흐뭇해 하더군요. 정리 용기를 구입해서 자잘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아두고 스스로를 폭풍 칭찬하고요. 여기저기 검색을 해서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요리 채널을 찾아 구독하며 열심히 따라 했는데, 특히 스텐팬부심이 각별했습니다. 달걀을 부치거나 생선을 구울 때 눌어붙거나 타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제게 종종 사용법 강연을 하고는 했어요. 아내가 만든 요리는 나름 훌륭했는데 레시피를 충실하게 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충 뚝딱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저와는 많이 달랐어요. 덕분에 아내의 달걀찜은 일식집에서 맛보던 것과 흡사했습니다. 데리야끼 생선구이는 늘 훌륭했고요. 저는 미역국을 좋아하는데 제가 만들면 늘 뭔가 부족했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끓인 미역국에선 익히 알고 있는 그 구수하고 진한 맛이 나더군요. 그냥 굽기만 해도 맛있는 고구마를 적당히 한 번 구워낸 후에, 칼집을 내서 버터와 꿀을 넣고 치즈를 올려 구워주고요. 대접받는 느낌도 들고, 눈도 입도 즐거웠습니다. 아내가 해준 음식도 맛있었지만, 그때 느끼는 편안함과 잔잔한 행복감이 좋았습니다.      


아내가 만든 요리들, 감자칩도 직접 만드는 정성,  갈비찜은 사랑이죠.



아내는 소소한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행복을 길어 올리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매사에 긍정 회로가 작동한달까요. 특히 설거지를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설거지를 하면 그렇게 즐겁고 마음까지 정화된대요. 아내는 설거지를 할 때 제가 뒤에 가서 살짝 안아주는 걸 좋아해요. “나는 이게 그렇게 좋더라. 왜 좋아하는지 알아? 거부할 수가 없거든.”하며 홍홍홍 웃어요. 며칠 전 일이었어요. 살짝 포옹을 하고 돌아서는데 “너무 짧은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냥 인사만 한 거야. 아까 봤으니 목례만 해도 되잖아?”라고 했죠. 그러자 “이런 사람이었어? 예의가 없네, 설날 아침 세배만큼 성의있게 해야지.”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아내는 가구 배치를 바꾸거나, 마트 다녀오는 길에 커피를 마시거나, 잠깐 낮잠을 자는 것과 같은 작은 일에서도 행복감을 느꼈지만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열심히 일을 해도 시간이 부족하고, 게으르게 보내도 시간이 부족해.
참 이상해, 매일 바빠.

맞아요. 가사 노동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번잡한 일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나요. 그런데 해도 티가 안 나던 일이, 안 하면 어찌나 순식간에 도드라지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죠. 잠시만 방심해도 설거지나 빨랫감이 쌓이고, 재활용 쓰레기배출은 한 주만 건너뛰어도 다음 번 배출 때 다른 집 보기에 민망해집니다. 그러니 집안일이라는 게 참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나 성장이 없으니 동기부여도 잘 안 되고요. 그러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마음 상하는 일도 부지기수죠. 어느 저녁에 저도 모르게 “왜, 집에서 놀 때 이것저것 해보면 좋지.”라고 말했거든요. 아내는 바로 따져 묻더군요. “내가 놀아?”라면서요. 아차 싶었습니다. 평소 머리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야, 너무나 폭력적인 표현이잖아, 인식을 바꿔야 해’라고 생각했었으면서 한편으론 바깥양반으로서의 알량한 권위 의식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 바로 사과했지만 아내는 꽤 서운했겠지요. 저 역시 그런 말을 내뱉은 스스로에게 실망했습니다.     



 

아내가 있어 안온했던, 저의 호시절이 저물어 가고 있네요. 아내 역시 안사람으로 살기로 한 시간이 끝나가니 생각이 복잡해지나 봅니다. 설거지를 하며 내다본 창밖 풍경을 ‘지난 1년’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제게 보내왔더라고요. 지나온 계절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는 사진을 보니, 달라진 풍경만큼 우리에게도 뭔가 변화가 있었을까, 생활이나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돌아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아내 없이 살아야 할 앞으로의 시간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언제가 아내는 안사람이라는 자리가 생각보다 꽤 버거워서 지난 세월 바깥양반으로 지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 시절, 스스로를 꽤 괜찮은 남편이자 아빠라고 생각했다더군요. 그런데 안사람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끄러워졌대요. 한 귀퉁이 슬쩍 거들어놓고는 세상 성실하고 다정한 것으로 착각했다고요.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더라도 안사람의 역할을 계속하겠다고 하더군요. 지난 10년간 제가 해온 일이니, 그에 대한 사과와 감사의 의미로 앞으로의 10년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고요. 저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옳다구나, 제발 좀 그래라.”라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저희 부부가 이런저런 각오를 한다고 해도 실제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될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직작생활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아내 자리에 있고 싶어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을 거예요. 저 역시 나누거나 미루고 싶어도 전처럼 제가 다 짊어지고 가면서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전과는 좀 다를 거야, 어딘가 달라도 분명히 다를 거야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적어도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이 꽤나 많은 공이 드는 복잡다단한 것이고, 그래서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기만 해도 그 자체가 이미 작은 기적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와 공유하게 되었으니까요. 혹여 기대와 달라도, 그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아쉬운 대로 이해하게 되겠죠. 그거면 됐습니다.     

 

또 다른 큰 수확이 있는데요, 그것은 저희 아이들이 남자와 여자, 아빠와 엄마,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는 저희가 겪은 진통을 그대로 겪지 않아도 되겠지요. 저희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요?      

    

엄마 쉬세요 카드, 이 정도면 많이 일했으니 조금 쉬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침대로 가서 저랑 이야기 나눠요.


아빠 쉬세요 카드, 설거지 하기 힘드셨죠? 좀 누워서 쉬세요. (아빠를 재운 후 조심히 문 닫고 나가주는 센스! )





설렘으로 가득한 1월의 일기!



슬프고도 슬픈,  12월의 통보...


12개월째 이런 일은 다반사. 바쁜 아침, 아내가 특유의 느긋함으로 0.8배속으로 움직이자 순간 짜증이 났다. 지랄 맞은 성질머리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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