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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Feb 27. 2021

아빠의 여친과 마주치다

-그의 생파에서

긴가민가 했는데 딱 걸렸네요.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네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언니 것 둘, 제 것 둘. 여자분이 아빠 등 뒤에서 아빠를 감싸 안으며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지. 호호호” 하시는 것을요. 처음 집에 들어섰을 때, 홍일점으로 아빠 옆자리에서 식사 중인 모습을 보고 여친일까 여친일까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정답을 알게 되었네요. 여자분은 저희를 발견하시곤 조금 머쓱해하며 팔을 풀고 자리에 앉으셨어요. 당신의 생파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던 아빠는 두 딸의 등장 따위 아랑곳하지 않으셨고요. 이해합니다. 여든다섯, 한창 그럴 나이니까요. 좋을 때죠. 연애야말로 인생의 꽃이 아니던가요. 무료하게 시들어 있는 것보다, 우울하게 지는 것보다 보기 좋아요. 우리 아빠는 오늘도 절정이네요. 내 사랑 박노인님, 리스펙!!     


아빠를 보러 일부러 내려갔지만, 몇 달 만에 봤지만, 서울에서 아빠 계신 곳까지는 5시간이나 걸리지만 뭐 어때요, 봤으니 됐어요. 저와 언니는 준비해 간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 드리고, 부엌을 조금 정리한 후 서둘러 돌아 나왔어요.

“조금 전에 봤어? 여자 친구 맞나 봐.”

“봤지, 그런데 전에 뵀던 할머니가 아닌 것 같아”

“그치? 전에 아빠한테 방석 선물한 할머니 말이야. 언니가 본 그분은 평범한 할머니랬잖아. 오늘 뵌 분은 평범한 할머니라기보다는 좀 통통한 할머니 같은데? 그때 그분이랑은 실루엣이 다르지?”

“응, 맞아. 다른 분 같아.”

“오, 우리 박 노인님, 능력자!!”     




저는 아빠의 여친을 환영해요. 활력 있는 아빠의 삶이 좋거든요.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시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게 되었을 때, 아빠와 저희는 병실 밖 의자나 병원 옆 모텔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셨죠.

“아내를 먼저 보낸 친구들을 보니 보통 3년 안에 따라가더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는 또 뭘 하며 보내나, 오늘은 또 어떻게 끼니를 때우나, 하루가 너무나 길다는 거야. 그렇게 무기력할 수가 없다는구나.”


엄마가 떠난 지 벌써 5년 반이 흘렀어요. 저희 아빠는 상처한 친구분들과는 달리 인생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계세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고, 연로하시다는 점만 빼면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여기저기 다니시고, 드시고 싶은 음식도 알아서 잘 챙겨 드세요.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좋아하는 시 마음껏 쓰시고, 서예도 하시고. 무엇보다 고된 농사일에서 해방되셨죠. 엄마가 살아계셨을 땐 조금씩 짬을 내어 취미 생활을 하실 때 빼고는 밤낮으로 일만 하셨거든요. 가난한 형편 때문에 평생을 소처럼 사셨죠. 지금은 씐나게 노는 소문난 ‘슈퍼 한량’ 할배인데, 저는 이 모습이 가슴 벅차게 좋아요. 팔십 가까운 나이에 비로소 고된 짐을 내려놓고, 성향대로 취향대로 욕망대로 사는 삶이라니. 아빠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며, 얽매임 없이 사시는 모습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한 것 같아서 슬며시 눈물이 납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노동자에 대한 연민과 존경의 마음이에요.  

    

 존경하는 박 노인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손.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노동자.  


몇 달 전 아빠와 통화할 때, 저는 진심을 담아 박 노인을 응원했어요.

“아빠, 하고 싶은 것 다 하세요. 돈도 막 써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써버려요. 땅도 아끼지 말고 팔아서 써버려요. 고민하고 망설일 게 뭐 있어요. 그 나이쯤 되면 막살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난 아빠 편이야, 뭐든지 맘대로 다 해요. 잊지 마요. 돈 팍팍 써요.”

전화기 너머 욜로님은 제 말이 썩 마음에 드셨는지 오냐오냐 하시며 연신 껄껄 웃으셨어요. 하긴, 친애하는 의 독거노인님은 사실 타고난 긍정맨이세요.      




80년을 무겁게 사셨으니 20년은 제멋대로 가볍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빠의 모든 취향과 취미, 일상과 일탈을 응원하고 싶어요. 그래서 여자친구도 오케이입니다. 물론 아빠의 침실이나 서재를 정리하다 연서를 발견할 때면 탐탁지 않아요. 엄마 생각이 나서 속상하죠. 하지만 50년 넘게 같이 산 아내를 아빠가 잊었을 리 없잖아요. 엄마와 함께 짓고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눈 뜨고 혼자 불 끄고 눕는데, 순간순간 엄마와 마주하지 않을 방법이 있겠어요? 아빠의 삶 속에 여전히 엄마가 함께하고 있다고 믿어요. 제가 그렇듯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이들이 큰 위로가 됐어요. “엄마, 외할머니 보고 싶어서 울어?”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안겨 올 때면 그 작고 따뜻한 것을 품에서 느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더군요. “너희는 좋겠다. 엄마가 있어서.”라고 말하며 한참을 안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아빠는 하루 종일 이런 온기를 느낄 기회가 한 번도 없겠구나. 엄마가 계실 땐  서등도 긁어 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나란히 누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들었을 텐데.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없는 하루라니. 혼잣말 말고는 사람 목소리가 나지 않는 집이라니.’ 아빠의 외로움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에이는 듯했어요.     


아빠의 상실감은 그대로 몸에 드러났어요. 어느 저녁에 무심코 손목을 쥐어보시고는 너무 헐렁하게 잡혀서 몸무게를 재어보니 6kg이나 줄어 있었대요. 3주 만의 일이었어요. ‘그 후론 한 숟갈만 더 먹자, 딱 한 숟갈만 더 먹어보자’ 하시며 의무적으로 식사를 하셨대요. 그리고 아빠는 엄마의 1주기 즈음에 추모 시집을 내셨어요.

황망히 아내를 보낸 후 아내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글로 썼습니다. 이것 말고는 달리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해줄 것도 없었습니다. 아내의 소천 일 주기를 맞아 아내에게 드리는 글을 책으로 엮어 그간 동고동락해준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시에서 아빠는 끊임없이 엄마를 찾고 계셨어요. 아빠의 눈이 가 닿는 모든 곳에 엄마가 계셨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었어요. 함께 씨앗을 뿌리고 함께 일궜는데 혼자 거두려니 모든 낟알마다 눈물이 방울방울 따라붙고, 수확이 많을수록 안타까워하셨어요. 아빠의 공허와 절망, 회한과 슬픔, 외로움과 그리움이 절절이 담겨 있는 아빠의 시집은 엄마에게 바치는 것이었지만 제게도 소중한 선물이었어요. 엄마의 이야기였고, 아빠의 마음이었거든요.      


오랜만에 아빠의 시집을 읽고 페이지마다, 행간마다 눈물을 훔쳤어요.


아빠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엄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는지 아니까 괜찮아요. 무뎌지긴 했겠지만 여전히 많은 순간에 헛헛함을 느끼시겠지요. 살아보니 가족과 친구는 다르더라고요. 가족은 가족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다른 의미로 힘이 되더군요. 여친은 최애 절친일 테니 그야말로 힘의 원천이겠지요. 그래서 아빠가 친구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그저 감사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친구도 좋아하셔서 무척 공사다망한지라 친정에 가도 아빠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해요. 그래도 서운하기보다는 다행스러워요. 아빠의 하루하루가 무료하지 않고 쓸쓸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에요. 그래서 여친도 진심 땡큐입니다.



     

무척 다행스러운 건 엄마가 누워 계신 곳에서 저희 집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실 처음 산소를 마련했을 땐, 엄마의 생전 일터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좋으면서도 작은 언덕 때문에 집이 가려지는 건 아쉬웠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네요. 아빠의 부담도 덜고, 엄마의 질투도 방지하고.  

남편의 말이 맞았어요. 이 남자, 미래를 내다보는 명철함이 있군요. 아니면 남자 마음은 남자가 아는 건가요? 그날 산소에서 남편이 이렇게 말했거든요.

“일 좋아하는 장모님, 하루 종일 논밭 보고 계실 수 있으면 됐지. 집까지 내려다 보이면 장인어른이 부담스러워서 안 돼. 지금이 딱 좋아.”        

   

엄마, 편히 쉬어요. 이제 일은 그만해. 논밭은 눈으로만 봐요.




아빠,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에요.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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