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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Mar 01. 2021

이게 다 마켓컬리 때문이에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마도

     

“안녕하세요. 마켓컬리 ㄱㄷㅎ기사님이시면 제게 연락(문자) 좀 부탁드립니다. 010-1234-5678”     


오밤중에 현관문 밖에 메모 놓아두기 - 뒷날 아침에 두근거리며 핸드폰 확인하기

요즘 제가 자주 하는 행동입니다. 아마 오늘도 하게 될 것 같아요. 아마도요. “아, 이제 안 할 거야.” “그만할 거야.” “진짜 안 할 거야”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마켓컬리에 주문을 넣은 날이면 ‘딱 한 번만,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야.’ 중얼거리며 또다시 메모를 내놓습니다.      


앞집 사시는 분들이 우연히 제 메모를 보게 되면 ‘무슨 일이지?’ 하실 것 같아서 좀 신경이 쓰여요. 14층에 사는 제 또래 남자분은 운동 삼아서 늘 계단으로 다니시는데 지나다 제 메모를 보셨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네, 제가 봐도 좀 이상하긴 해요. 아무래도 사연이 궁금해지는 흔치 않은 메모죠.  

“여보, 기사님들이 물건 내려놓다가 깜짝 놀라시는 거 아니야? 내가 뭐 잘못했나 하고.” 남편의 말을 들으며 저는 더욱더 안절부절못합니다. 놀라게 할 마음이나, 부담을 드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아, 제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해결되는 건 하나 없고 점점 저만 이상한 여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정말 곤란해요. 네, 짐작하신 것처럼 저는 ‘은근 꽤 소심쟁이’입니다. 사는 걸 무척 즐기는 편이라 종종 걱정까지 사고 말아요. 오늘도 11시가 되기 전에 이것저것 사고선, 수순처럼 내일 아침분의 걱정까지 사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저도 더는 못하겠어요.      


제가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 요 며칠 ‘내돈내산’이 아닌 ‘남돈내먹’을 하게 되어서랍니다. 네, 남의 돈으로 사서 제가 먹어버렸어요. 더 문제는 그게 누구 돈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확실하진 않아요. 돈 많은 대표님이 사주시는 거면 두 팔 벌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겠고, 운 좋게 경품에 당첨된 거라면 ‘이게 웬 떡이냐!’ 하겠지만! 그런 아름다운 상황은 결코 아닌 것 같아요.          




2주 전, 컬리 기사님께서 냉동식품을 잘못 배송하신 게 사건의 발단이었어요. 냉장식품을 정리한 후, 냉동식품 박스를 열었더니 낯선 품목들이 들어있었어요. 육전용 한우, 등심돈가스, 한돈주물럭. 제가 주문한 떡볶이와 갈비탕은 없었고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식품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까 우선 냉동실에 넣어두고, 상담 톡에 문의 글을 남겼어요. 돌봄 교실에 가는 두 아이의 도시락까지 챙겨야 해서 정신없이 서두르고 있는데 전화가 오더군요. 상자에 있는 주소, 가운데 글자가 가려진 주문자 이름, 품목 등을 읊어드리니 상담원은 ‘잘못 배송이 되었다, 죄송하다, 어떤 조치를 원하느냐, 재주문하겠느냐, 환불을 받겠느냐’ 묻더군요. 급히 필요했던 게 아니고 냉동실에 쟁여두려던 거라 환불 처리를 해달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제가 받은 제품은 어떻게 반품을 해야 하느냐 물었더니 ‘신선식품이라 수거하지 않는다, 자체 처리하면 된다’라고 하더군요. ‘무슨 뜻이지?’ 잠깐 생각하다가 우선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알아서 하라고? 그냥 먹으라는 건가? 식품을 수거하는 과정에서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 아예 수거하지 않겠다는 거구나. 오, 시스템 쏘쿨!’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두 아이 챙기고, 제 몰골 추슬러서 사회인으로 환골탈태하고 나오느라 금세 잊었어요. 눈 뜨면 전쟁인데 한눈팔면 지각이니까요.      


그런데 출근 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배송 사고로 인한 손실액을 누가 부담할까 궁금해지더군요. 제가 받았던 품목의 가격을 검색해 보니 약 3만 원 정도였어요. 원래 주문했던 건 15,000원 정도였고요.

‘배송 실수 한 번에 45,000원이나 손실이 생기다니. 마켓컬리는 이런 금액을 부담하고도 운영이 되나? 아니야, 이건 기사가 실수한 건데 컬리에서 부담할까? 혹시 기사분이 채워 넣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런 거야? 이 많은 금액을?’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그때부터 심란해졌어요.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실수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을 텐데, 분명히 페널티도 있을 테고. 그런데 돈까지 물어낸다고? 배송 수당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45,000원은 너무 큰 금액이잖아, 이런 실수가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금액대가 훨씬 큰 경우도 있을 테고. 안 돼, 이건 너무 비인간적이잖아.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이건 아니야.’


상자에 적힌 주소를 검색해 보니 집에서 600미터가량 떨어진 곳이더군요. 멀지 않은 거리니 직접 품목을 교환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아, 그럼 퇴근 후에 다녀와야겠다. 가서 메시지랑 내 전화번호를 남기고 오는 거야. 혹시 뒤바뀐 품목을 교환할 수 있느냐고. 냉동식품이니 문제없을 것 같은데.’     

퇴근 후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었어요. 아침엔 너무 바빠서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 금액을 사측에서 부담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기사분이 부담을 해야 한다면 너무 타격이 크실 텐데 혹시 제 짐작이 맞느냐고 물었어요. 상담원은 아마도 그럴 것 같다고 답하더군요. 그렇다면 물품을 맞교환해서라도 기사분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다. 그렇게 해결하는 건 가능한지 다시 물었어요. 그러자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이미 양쪽에서 환불을 요구해서 처리했다. 그리고 저와 달리 그쪽 분은 아침에 화가 많이 난 상태로 항의를 하셔서 아마도 교환이 어려울 것이다. 제 마음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더군요.(오잉, 잠깐만. 모든 통화가 녹음되는 건 알겠는데, ‘고객이 화가 많이 났음’이라고 메모라도 한 걸까요?)     

 

흠, 맞교환으로 해결할 수 없군요. 그리고 ‘그런 것 같다니’ 상담원은 자기 분야가 아니라 잘 모르시는 걸까요. 전화를 끊고 나서 검색창에 ‘마켓컬리 오배송’을 넣어 봤어요. 역시 큰 회사라 환불도 깔끔하다, 신선식품을 수거하지 않으니 믿음이 간다라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마켓컬리 오배송, 참 쉬운 일 없네요”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들어왔어요. 읽어 보니 남편이 컬리 식자재 배송 기사인데 배송 사고가 나면 기사가 부담을 해야 한다. 지난달에는 28만 원을 물었는데 이번에도 7만 원을 물어야 해서 속상하다는 글이었어요. 하, 사서 한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네요. 좋아, 그럼 내가 기사분께 직접 드리지 뭐. 어쨌든 난 물건을 받았고, 다행히 필요 없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먹으면 되지.      


다음날 상담 톡에 다시 메모를 남겼어요.

지난번에 저희 집에 배송하신 ㄱㄷㅎ 기사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오배송하신 일로 기사님이 금전적 손해를 입으실 것 같은데 제가 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정보 때문에 알려 알려주실 수 없다면 제 번호를 기사님께 남겨 주세요.     
평소에 의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인데... 나 왜 이러지. 흐엉.


상담원은 10여 분 후 이렇게 톡을 보내오셨어요. 다행이네요. 하지만 저는 왜 이 메시지를 100프로 신뢰할 수 없는 걸까요? 조금 의심이 되는 겁니다. 그냥 대외적인 응대 멘트 같은 느낌.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배송 기사분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고, 컬리는 너무 잘 나가고. 같은 노동자로서 느끼는 연대감인지, 을의 입장에서 느끼는 동병상련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요. 그래서 그날 이후 메모를 내놓게 된 거예요. ‘흥, 직접 드릴 거야. 내가 확인해 볼 거야.’하고요. 이삼일에 한 번씩 주문을 하고 있는데 연이어 다른 기사님들만 오셔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결국 이번 주에 육전, 주물럭, 돈가스 순으로 음식도 먹었어요. 한 번도 주문하지 않았던 것들인데 웬걸 다 맛있더군요. 특히 돈가스는 집에서 요리해 본 적이 없는데 나름 머리를 써가며 달군 프라이팬에서 기름옷을 살짝 입히고 에어프라이어로 옮겨서 마저 구웠더니 식당표 부럽지 않은 바삭한 식감이 나더군요. 세 가지 모두 분명히 팩을 뜯을 때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어느새 웃으면서 먹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제가 컬리 손바닥 안에 있는 작고 작은 즘생임을 실감했어요.


명절도 아닌데 육전을 맛보다니, 매우 낯설다. 맛은 좋고.


집에서도 돈가스를 먹을 수 있구나. 나에겐 돈가스를 잘 굽는 재능이 있었구나. 빵가루는 정말 바삭하구나. 많은 것을 배움.


그날 밤 돈가스 두 팩을 장바구니에 담는 저를 보며 남편이 말했어요.

“ㄱㄷㅎ님이 사실은 컬리 마케터 아니야? 고갱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하고 준 거지. 안 먹어 본 음식만 딱 들어있었는데 먹어 보니 다 맛있잖아. 제대로 영업하셨네.”     

역시 이 남자는 실없는 소리 전문이네요. 몰라요, 진실이 뭐든 저는 오늘 한 번만 더 메모를 놓아둘래요. 이번에도 다른 분이 오시면, 기사님들 사이에 ‘그 아파트 704호에 사는 사람, 좀 이상하던데?’ 하는 소문이 나기 전에 그만둘래요.     

 

하지만 솔직한 제 마음은.  

하나, 소문은 진즉에 났을 수 있다. 둘, 이번에도 ㄱㄷㅎ님이 안 오시면 그냥 기사님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놓아두자. 돈을 못 전하면 마음만 전해도 돼. 셋, 배송 오실 시간에 기다리고 있을까, 다른 기사님들께라도 사정이 정말 그런지 여쭤보게. 기다리고 있으면 섬뜩하긴 하겠다. 그 새벽에.


하아, 나 왜 이러지. 을의 연대 따위 기사님은 원치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어쨌든 이제 고민 끝. 오늘로 정말 끝.







덧붙임.

혹시나 정말 기사님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면 다행이에요. (저는 컬리가 주신 거라면 편히 먹을 수 있어요. 하핫.) 그리고 컬리 측에서 충분히 배송 기사분과 상생하고 있다면 그 또한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사서 걱정한 것, 사과 드려요. 컬리에 몸담고 계신 분이 보시면 속상한 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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