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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Sep 13. 2024

2. 칼바람 속에서도 꽃은 핀다

캐나다 학교에서 첫날


봄기운이 조금씩 느껴지던 4월, 유스 호스텔 삶을 청산하고 이곳에서 첫 학교를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이 조바심이 났는지 이사와 동시에 렌트한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로 찾아갔다. 유치원부터 8학년까지 있는 꽤 규모가 큰 학교였다. 교무실로 가서 필요한 서류를 보여주니 다음 주부터 등교를 해도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교장이 한국인 2세 재학생을 교무실로 불렀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였다. 여기에 한국인이 있다니! 이 사실만으로도 캐나다 학교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었다. 언니가 서툰 한국어로 교장의 말을 통역하느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중에 하나는 명확하게 뇌리에 박혔다. 교장이 반복하면서 신신당부한 부탁이었다. 



“도시락이나 간식으로 피넛버터를 절대, 절대 싸지 말아 주세요.” 



의아했다. 피넛버터를 먹으면 안 된다니?  


난생처음,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땅콩 알러지 존재에 대해 안 순간이었다. 한국에 살면서 땅콩 알러지는 들어보지도 못했을뿐더러 그 외 어떤 알러지도 있는 친구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땅콩버터에 대한 팩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실로 나중에 선생이 되어 심한 땅콩 알러지 있는 학생이 다른 학생의 간식을 뺏어 먹다가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교장이 땅콩이나 다른 견과류는 학교에 아예 가지고 오지 말라고 강조, 또 강조를 한 것이다.   



짧은 오리엔테이션 후 복잡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설렘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교장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과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국에 있을 때 영어학원 좀 다녀 둘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나름 준비한다고 주말에 기본 대화를 복습해 봤지만 그것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알 수 없었다. 



등교를 하던 첫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학교에 들어갔다. 교무실로 가니 누군가가 나에게 “하우 아 유?”라고 물었다. 그나마 알아듣는 말이 나와 안도감이 돌았고, 나는 복습한 대로 자신 있게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라고 꼬박꼬박 대답했다. 나를 쳐다보던 의아한 눈빛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왜 그럴까? 이렇게 대답하라고 배웠는데. 영어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을 때 알게 되었다. 아무도 이렇게 간단한 안부 인사에 또박또박 교과서처럼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무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통역을 해줬던 한국인 2세 언니가 밝은 미소를 띄며 나타났다. 얼마나 구세주처럼 느껴지던지.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언니의 모습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온몸을 조금 풀어주었다. 



언니는 나를 반에 데려다주며 담임 선생님 소개를 했다. 


Ms.LePage. 영화에서만 보던 짧은 금발머리, 파란 눈을 하고 있는 백인 선생님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셀러리 스틱을 먹으며 내 이름을 물었다. 셀러리의 역한 냄새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대체 저걸 어떻게 오이처럼 먹는 걸까. 신기해하며 멀뚱멀뚱 있으니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니?” 

“마.. 마이 네임 이즈 유.. 윤선.” 

“연선?” 

“노, 윤선.” 

“윤순?” 



몇 번을 다시 말해도 제대로 발음을 못 할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했다. 지정해 준 책상에 가서 앉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마조마 눈치를 봤다. 월요일이니까 여기도 한국처럼 다 같이 나가서 아침 조회를 하려나? 영원처럼 느껴졌던 교장 선생님의 연설을 듣고 일렬로 줄을 맞춰 국민체조를 했던 한국의 월요일 아침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캐나다 국가인 “O Canada”가 흘러나왔고 학생들은 일제히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체조할 차례인가? 내심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대했지만 교장의 연설도 없고, 국민의례도 없었다. 국가와 함께 조용히 일어났다가 다시 조용히 앉는 것이 전부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왔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따라간 곳은 카페테리아였다. 생기 있는 학생들의 수다가 카페테리아의 공기를 꽉 메웠다. 쉴 틈 없이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영어는 나를 공격했다. 도망가고 싶었으나 도망갈 수 없었으므로 최대한 나를 숨길 수 있을 만한 구석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구석이 나의 자리가 되었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엄마가 싸준 딸기잼 샌드위치와 한 모금만 마셔도 설탕을 통째로 먹은 듯한 Sunny D 오렌지 주스로 허기지지도 않은 배를 채우고 있자니 이상한 쓴 맛이 느껴졌다. 친구들과 반찬을 나눠먹고 소시지나 스팸이 들어가 있는 도시락을 찾아다니던 한국 점심시간이 그리웠다. 여기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언제쯤 영어를 잘해서 쟤네들과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답도 없는 물음에 혼자 답하며 딸기잼 샌드위치 한입 먹었다. 외로움을 머금은 딸기잼은 쑥처럼 쓰디썼다.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도 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매번 내 이름을 고쳐줘야 하는 일이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었다. 아예 단념을 하고 그냥 편한 대로 부르게 내버려두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불러진 아무개가 되어 조용히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가끔 한국인 언니가 나를 구원해 주길 내심 기대했지만 6학년과 8학년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복도에서 보면 인사정도는 했지만 살갑게 나를 살피는 일은 없었다. 바쁜 중학교 마지막 학년의 삶에 나까지 넣을 수는 없었겠지. 그렇게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학교 생활을 하던 중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수학시험에서 95점을 받은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시험지 위에는 온통 빨간 체크표시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맞는 답을 동그라미 치는데 여기서는 틀린 답을 동그라미 친다. 그래서 나는 내 점수가 시험의 95%를 틀렸다는 말인 줄 알았다. 분수 시험이었는데 한국에서는 3, 4학년이면 다 아는 걸 왜 6학년이 배우는지 놀라며 신난 마음으로 시험을 쳤던 터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빨간 체크표시로 뒤덮여 있는 시험지를 받고는 역시, 6학년 시험이 이렇게 쉬울 리 없다며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보다 더 절망적인 눈으로 자기 시험지를 꼼꼼히 살펴보던 짝이 내 점수를 슬쩍 보고선 애들한테 호들갑을 떨었다. 우르르 몰려온 애들은 내 점수를 확인하더니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 얘도 할 줄 아는 게 있네?” 이유도 모른 채 한 아이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아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너 95점 받았어. 진짜 잘한 거야!”


선생님한테 시험지를 가지고 가서 “엑설런트!”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95점을 받았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이 날 이후로 반 아이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얘가 꿔다 놓은 보릿 자루 같은 바보는 아니었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학교에 대한 긴장감은 줄어들었지만 난 여전히 외톨이었다. 카페테리아 구석이 편했고 외로움은 내 베프였다. 유년시절 경험한 첫 외로움이 칙칙한 회색빛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마음 붙이지 못하고 홀로 여기저기 떠돌던 나에게 관심을 보여준 두 학생 덕분에 이 외로움에도 꽃이 피었다. 



한 학생은 흑인이었다. 이 학교는 유색인종보다는 백인이 많은 동네에 있었는데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던 백인 학생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이 흑인 아이만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백인은 그나마 미디어로 접할 기회가 있어서 신기하진 않았지만 난생처음 보는 흑인아이는 신기했다. 까만 피부에 곱실거리는 머릿결은 피넛버터 알레르기의 충격만큼이나 신선했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흑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막연하게 흑인은 그냥 무서울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이 아이는 환한 미소로 시종일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곧 다른 친구에게로 가버렸지만 아이의 관심이 고마웠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일은 내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니까. 



다른 학생은 내 시험결과를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며 엄지 척을 날려줬던 친구였다. 그 반에서 유일하게 나를 챙기던 아비게일 (Abigail)이라는 아이였다. 친절이라는 이름은 마음속에 오래 남기 마련인지 수십 년 지났는데도 이름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아마 사회 시간이었을 것이다. 못 알아듣는 나를 앞에 두고 아비게일은 온갖 몸짓, 표정을 동원해 토픽을 설명했다. 나를 위해 애쓰는 애를 보며 알아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꽝이었다. 아비게일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알아듣는 척이라도 열심히 연기했다. 그런 아비게일을 보며 다른 애들이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바보 같은 애한테 설명하느라 애쓴다.. 하는 표정으로. 아비게일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 수업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는 그 아이를 보며 처음으로 캐나다의 봄을 느꼈다. 칼바람으로 뒤덮인 이곳에도 봄은 기필코 찾아오는구나. 누군가의 끈질긴 친절함은 차디찬 얼음장 같은 마음에 균열을 낸다. 



나와 동생이 학교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부모님은 정착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우리가 렌트를 하고 있는 동네보다 노스욕 (North York)이라는 동네가 좋다는 소문을 들으신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동양사람들이 많이 살고, 그로 인해 교육의 질도 높다는 것이었다. 동양사람의 학구열은 세계 어디 가나 알아주긴 하나보다.



그래서 한 달 후 우리는 노스욕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제 조금씩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떠나야 한다니 아쉽긴 했지만 방을 렌트하는 삶에서 벗어나 나만의 방을 갖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설렜다. 얼마 후면 이사를 간다고 하니 선생님이 작별파티를 열어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내 이름을 새긴 열쇠고리와 굿럭과 그리울 것이라는 메시지가 가득한 롤링 페이퍼를 선물 받았다. 그제야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교우들에 대한 서운함이 풀렸다. 윤순, 연순, 연선.. 한 번도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으면 어떤가. 마음으로 나를 맞아줬는데. 



캐나다의 첫 봄을 여기서 보낸 탓인지, 아님 착했던 아비게일의 눈빛이 기억이 나서 그런지, 한 달 남짓 있었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4월이 오면 그곳이 떠오른다. 개나리처럼 밝은 아이들의 얼굴이. 나의 마음을 녹여주었던 따스한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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