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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ug 28. 2023

메이킹 뉴스 읽기 #01

23.08.28. 게이 터크먼, <메이킹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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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서 거금을 내고, 동문회원으로 신청했다. 그래야 책을 빌릴 수 있었다. 게이 터크만의 <메이킹 뉴스>를 빌려왔다. 오래된 책이지만 여전히 메모할 가치가 있는 내용들이 많다. 중고로 사려니 최소 4만, 최대 15만원까지 달라는 통에 차라리 그 돈을 내고 도서관에서 빌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내서 일단 서문부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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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세계를 향해 나 있는 창이며, 창의 모습에 따라 보이는 세계의 풍경도 달라진다. 그것은 투명하지 않다. 뉴스라는 창(frame)을 만들어내는 방식, "뉴스 제작의 작업 및 뉴스 제작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지"(19)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그렇다고 뉴스 제작자 개인의 능력이나 품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뉴스 제작자의 전문성과 그러부터 비롯되는 결정들이 조직의 필요에 따라 도출되는 방식"(20)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 개인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든 간에, 그가 훈련받은 뉴스 제작 과정 그러니까 사태를 뉴스로 전환시키는 그 과정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실을 재구성한다고 본다.


무엇이 뉴스가 되는가, 그것은 뉴스가 될 필요가 있는 사태들이다. 사람들이 알고자 하고,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사태나 정보가 뉴스로서 취합된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지식 그 자체를 '형성'하는 행위다. 매체가 자주 그리고 오래 보도하는 사태들은 그 '장기 보도' 자체를 통해, 독자나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사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미디어를 신뢰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도 다른 의제를 선택하기 곤란할 때가 많다. 인간의 인지 능력엔 한계가 있고, 다양한 미디어에서 비슷한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면 그 외의 뉴스들을 골라 보는 일이 물리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수용자들을 조종하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뉴스가 단순한 사건을 공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사건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 사건에 공적 성격을 부여"(21-22)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공적 성격의 사건이기에 좋든 싫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뉴스는, 뉴스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정보를 누구에게나 전달함으로써, 복잡한 사회 속 행위들을 조정한다. 뉴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빈번한 살인 예고를 놓쳤을 수도 있고, 그리하여 그 예고된 장소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 필요에 따라 고위 관료가 흘린 정보들에 돌아올 반응들은 논란이 될만한 주제에 대한 대중의 분위기를 예측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뉴스를 듣는 쪽이든, 만들어내는 쪽이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익숙하게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대중 매체들은 1) 정보를 전달하고 2) 합법적 제도의 편에 서며 3) 전문가들에 의해 뉴스를 생산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2/3이다. "뉴스는 불가피하게 제도적 관행에 동의하는 뉴스 제작자가 제도적 과정에 의존해 만들어내는 산물이 될수밖에 없는 것"(23)이다. 심지어 이 전문직업인들은 보통은 "조직의 요구에 부응"(24)한다. 가끔 작업 과정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는가와 같은 대립 지점들이 있지만 게이 터크먼은 관찰 결과 "모두 현재의 사회적 제도를 상호보완적으로 강화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현상유지의 정당화에 기여하고 있"(24)다고 본다.


뉴스 그 자체는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전달과 윤색의 과정을 거쳐, 개인적 의미가 부여된 공공의 자원이다. 그리고 그것의 주도권은 기자들에게만 있지 않다. 왜냐면 그 뉴스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한다면 뉴스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사는 작성자와 수용자 사이의 일종의 게임이 된다.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 완성되는 순간, 즉 특정한 사태가 뉴스로서 가치가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 뉴스화된 사태는 서로가 공유하는 현상이 된다. 


뉴스가 진실 그 자체일 수 없는 것은, 이것을 길어 올리는 기자가 모든 사실을 다 취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듣고 경험한 것들 가운데에서도 골라내지만,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내용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비밀의 두 가지 차원,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그것의 내용을 알 도리가 없는 비밀, 다른 하나는 존재하는 것조차 알지 못해 내용을 추적할 상상조차 못하는 비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기자도 사람이므로, 사태가 기자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사전 논의를 바탕으로 게이 터크먼은 다섯 개의 질문을 던진다.

1) 어떻게 기자의 시공간에 특정 사건들만이 들어오나?

2) 특정 사건이 보도되지 않는 건 우리의 지식이 계층 체계에 기초해서일까?

3) 특정 사건이 주의를 못 끄는 건 그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일까?

4) 특정 사건이 주의를 못 끄는 건 뉴스 제작자의 전문가적 관점과 훈련된 무능력 때문일까?

5) 모든 사건들이 다 독특하다면 어떻게 이 정보들을 처리할 수 있을까?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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