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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ug 24. 2023

그래서 악인에게 서사를 줘 말어?

23.08.24. 듀나 외 <악인의 서사>


며칠 격조했다. 


회사 일로도 정신이 없고, 사적으로도 궁리할 게 많아서 책을 거의 못 읽었다. 당장 저널에 어떤 책을 가지고 글을 써서 보낼지도 정하지 못했다. 조급한데, 조급하니 글이 더 안 써진다. 악순환을 끊으려 서점으로 갔다. 손가락으로 책들의 제목을 훑다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악인의 서사>다. 마음이 어지러운데도 단숨에 끝까지 읽을만큼 재미있었다.


<악인의 서사>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문장을, 9명의 작가가 각자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질문으로 만들고, 이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텍스트를 참조한 비평들을 묶었다.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문장은 한눈에 보기엔 명료하지만, 악, 서사, 악의 서사화라는 세 개념에 대한 정의가 다르면 전혀 다른 내용을 지칭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 문장을 둘러싼 대부분의 논쟁은 서로 다른 이야기만 하다 끝난다. 이 책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있다. 각자 어떻게 이 문장을 이해하고 있는가?


서로 달려나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문장에 대해 '줘야 한다' 혹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답변은 곤란하다는 것. 오히려 악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의 재현이 온당한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이야기'라는 건 "인간의 복합성과 양가성, 도덕적 회색지대와 윤리적 딜레마 등을 추체험하는 장소"(11)인데, 이를 금지 명령으로 옥죄는 건 어쩌면 내가 보기 싫은 이야기들을 억압하거나, 자신이 '선'의 자리에 있다는 믿음을 추인하려는 시도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


각자는 이 문장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교화한다.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라'거나, '공감에서 벗어난 악의 서사가 필요하다'거나, '자기 연민이라는 악의 서사를 극복하라', '피해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악행에 접근하라' 등 각자의 방식으로 고쳐쓰고 대답한다. 작가들이 훑는 텍스트의 범위는 실로 다양하다. 서부극의 변동 속에서 악인의 서사가 윤리적으로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 묻는다거나, 다큐멘터리나 논픽션 르포를 통해 흩어진 피해자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는 방식으로 악행의 결과를 조명하거나, 철학자들의 개념들을 징거다리 삼는 방식으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쓴 책은 요약보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사유가 그 위에서 어떻게 부유하게 되는지 따져보게 되는 것 같다. 주제가 되는 개념과 문장은 있지만 이를 활용하는 방식이 다양한데, 이를 한 눈에 바라보고 비판할 시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 입장에선 더더욱 그런 독해가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유용하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다만 '범죄 미스터리' 프로그램을 몇 번 정도를 만들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말들이 유용했는지를 일별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모든 글은 각자 재미있었고 유용했으나, 그 중 내게 제일 와 닿은 글은 미스테리아 편집장 김용언의 것이다. 그의 글에는 살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만들 때, 고민하게 되는 기승전결의 구조와 흡인력을 위한 장치들이 필연적으로 '악인'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게 만들고, 그가 수행하는 '악행'이 모든 시선을 이끌 수 있는 매력적인 시도가 되게끔 압력을 행사하는, 전반적인 제작 과정에 대한 고민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를 벗어날 수 있는, 피해자 중심의 대안적 서사를 제시하는 부분은 '범죄 미스터리'를 제작하는 이들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범인의 얼굴이 텅 비어 있고 이름은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맥나마라는 범인에게 집중하지 않고 범인이 남긴 상흔과 고통을 섬세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범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치명적 공백을, 지식의 부재를, 그는 다른 종류의 지식으로 채워나가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골든 스테이트 킬러>를 통해 범행의 잔혹한 디테일을 음미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 가족, 생존자, 수사관들의 삶에 대해 새롭게 배우게 된다."(139)


오늘날처럼 범죄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았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다. 범죄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는데, 범죄를 조명하는 횟수는 늘어난다. 방송국마다 똑같은 사건을 다루는 범죄 프로그램이 하나씩은 있다보니, 이제 특정한 범죄들은 그 수법과 진행 과정, 그리고 잔혹한 결과물까지 외울 지경이다. 범죄 프로그램의 차별점은 얼마나 더 자세한가,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이 몰랐는가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수많은 '범죄' 프로그램들 가운데 대부분은 범죄자의 잔혹함과 유능함에 집중한다. 이는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매혹적으로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영웅적으로 그린다. 심지어 그런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사회적 조건들을 가져다 댈 때,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동정의 대상이 된다. 범죄자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잔혹한 범죄와 이를 만들어내는 사회만이 남는다. 사회적 조건은 범죄의 원인을 진정으로 탐색하지 않기 위해 편리하게 가져다대는 알리바이로 전락한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 진부한 인간이었음을 외면하고,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환상 속에서 끊임없이 만족감을 찾다 끝내 현실의 누군가를 죽이며 쾌락을 얻는 인간을 그리며, 어쩌면 경외나 공포를 유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썸네일을 누르고, TV 앞에 서고, 표지를 펼쳐보도록 하기 위해 침묵하거나 방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편재하는 악에 공감하지 않고도 악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상을 더 낫게 만들면서 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책은 고민을 끝내기보다 시작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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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죽어있는 상태로 읽었고, 아직 숨이 붙어 있음을 증명하였으므로, 다시 반죽음의 상태로 돌아간다. 언제 또 다른 책을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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