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학준 Aug 13. 2023

지금도 이미 재난인데

23.08.13.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글에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간만에 주말에 일정이 없어서 아내와 함께 심야 영화를 보기로 했다. 텐트폴 영화 중에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골랐다. 아파트 살기 시작한 지 반년 정도 되었는데, 이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의 숲이 주는 양가적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아파트 주민들은 아니었을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으려니 영화가 시작했다.


영문 모를 대지진으로 서울을 비롯한 세계가 다 쑥대밭이 되어버린 어느 겨울날, 황궁 아파트라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만이 무너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처음부터 내친 건 아니었지만, 어느날 주민을 상대로 한 칼부림과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식량이 떨어져가면서 주민들은 외부인들을 아파트 밖으로 몰아내기로 결정한다.


비인도적 결정이라며 반발하는 사람들과 주민부터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분쟁이 심화될 무렵, 방화를 헌신적으로 막아낸 김영탁이 대표로 선출된다. 그의 인도 아래 외부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주민들은 '즐거운 나의 집'을 꾸미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고 아파트를 보수하며 지옥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준비에 몰두한다. 


그러나 희망이 들려오지 않는 바깥의 상황과 식수와 음식이 부족한 현실은 사람들을 조금씩 악독하게 만들어간다. 인간된 도리로서 하면 안되는 일이 있다고 절규하는 도균과, 간호사로서 조금씩 악하게 변해가는 남편 김민성을 지옥으로부터 구해내려는 아내 명화, 그리고 김영탁의 진실을 알고 있는 주민 문혜원의 존재는 김영탁의 리더십을 뒤흔든다. 설상가상으로 아파트에서 내쫓긴 사람들, 아파트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계획을 준비한다.


#

영화는 풍자적인 시선으로 아파트 단지 사람들의 행태를 묘사한다. 블랙코미디로서 종종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지만 대부분 그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씁쓸한 탄식으로 변한다. 아파트에서 외부인을 몰아내고 재건에 몰두하는 희망에 찬 사람들을 소개하는 부분은 관객을 향한 홍보영상처럼 찍혀 웃음을 자아낸다. 그 중 백미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김영탁을 반바퀴 돌며 훑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마치 정치인의 시정 홍보 영상을 보는듯이 '연출'되었다는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쇼트는 그의 '선한 일꾼' 이미지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 직후 수색대를 이끌고 떠나는 그와 수하들의 행렬을 쫓는 쇼트는 마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을 떠올리게 만든다. 엄태구를 비롯한 노숙자들이 아파트 주민들이 '식인'을 한다는 소문을 주고받다가 잔해 위를 행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올려다보는 시선, 그리고 단호하고 경쾌하면서도 엄숙하게 줄을 지어 잔해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는 행렬의 모습이 교차할 때 두려움은 배가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아파트 밖으로 쫓겨나 얼어 죽은 국회의원의 시체가 나뒹군다. 그가 외부인과 주민 사이를 '중재'하려는 시도가 비아냥처럼 들릴 때, 이미 그의 죽음은 예상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의 행동이 조롱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었다는 건 이후 도균이 아무리 극한의 상황이어도 인간으로선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고 외치며 몸을 내던진 이후, 주민들이 영탁을 끌어내면서 '저 놈이 선동해서 외부인들을 내쫓게 만들었다'고 책임 회피하듯 소리를 지르는 순간이 되면 확실해진다. 


영화는 한 번은 국회의원을 냉소하고 몰아내어 죽음을 맞게 함으로써, 다른 한 번은 그런 국회의원을 몰아냈던 영탁과 주민들을 아파트에서 몰아내도록 만들면서 '냉소'의 우둔함을 지적한다. 물물교환이 가능했던 건 오히려 외부자들과의 교류가 자유로웠던 시기였고, 그들을 몰아내고 '우리 아파트'를 깔끔하게 만들려 시도할수록 수색대의 도덕적 부담은 커졌다. 죽고 죽여서 약탈해야 하는 삶이 그들이 바라던 '청소'의 결과였을까? 


#

사회가 무너진 곳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사회가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헬리콥터 한 대도 날아다니지 않을 만큼 이미 이 곳을 제외하고 모든 사회 인프라가 망가졌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임신을, 육아를, 나중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런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협력이나 교류 대신 철저한 고립을 택하고, 약탈을 시도하면서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말하는 주민들은 그 모순의 대가를 치른다. 


그게 꼭 극한 상황에서만 해당될까? 사회 유지에 들어가야 할 비용엔 인색하지만 정작 그 효과는 이전과 똑같이 받으려는 사람들의 세계가 된지 오래이지 않은가? 아파트 단지 입구를 틀어막고 아이들의 출입을 우회시키고, 택배 차량을 진입하지 못하게 하고, 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의 주거 위치를 구분하고, 심지어 도색을 다르게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돈 많으면 남을 불편하게 해도 되는 시대, 그것이 '우리 아파트'니까 여기 기여한 바 없는 사람들에게는 막 대해도 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시대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아니면 뭘까?


#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욕망이 극적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그 자체임을 드러내는 데 영화 초반에 붙어 있는 짧은 몽타주는 큰 역할을 한다. 거대한 아파트 숲의 성장과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 욕망이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대전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너무나 당연하여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없어도 재난영화로서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음에도, 이 몽타주 덕분에 영화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관객은 실제 자신들이 겪어 온 삶의 경험들을 이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자유롭게 동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일은 어려워지며 - 영화 스스로가 그러한 환상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시도들로 점철되어 있다 - 서사의 설득력은 관객 개인들이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으로 인해 강화된다. 다큐멘터리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순간이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면, 아마도 이 혼동의 효과가 더 잘 먹혀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재난이 왜 일어났는가, 어떤 상황이 바깥에 펼쳐지고 있는가, 그런 피해가 앞으로 회복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들을 생략하고 바로 재난의 현장으로 직행한다. 심지어 재난영화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뉴스 보도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보도 영상은 관객으로 하여금 눈 앞에 펼쳐진 재난에 대한 이해를 일부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조악함 (실제 보도 영상과 닮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그 언캐니함)으로 인해 재난의 사실성을 해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질문들을 생략하고 빠르게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마개 역할을 해준다. 경제성과 사실성 두 마리를 다 잡는 영리한 방법이지 않았나.


#

영화 후기들을 보니 명화가 발암캐릭터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도덕을 '배부른 소리'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오히려 도덕이라는 건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 제한된 생산물을 놓고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지 않아야 하기에, 상황이 위급할수록 필요한 것이 아닌가? 대책이 없었다는 게 문제라고들 하지만, 정작 가장 현실주의자이자 악역을 자처하던 영탁도 한 번은 아내에게 다른 한 번은 부녀회장에게 '네가 뭘 해결했는데?'라는 힐난을 듣는다. 영탁도 자신이 아끼던 가족을 잃었고 끝내 죽는다. 명화도 자신이 아끼던 남편과 자식같이 돌보던 아이를 잃는다. 결국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 아닌가?


왜 어떤 평범함은 존중받고, 어떤 평범함은 비난받는 것일까? 김영탁의 행동은 계속해서 정당화를 할만한 사건들을 플래시백으로 넣어주면서, 이 사람이 단순히 미친 인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 하지만, 명화의 행동에 대해선 그런 장치들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명화가 아이를 아끼는 이유는 김민성의 입으로만 한 번 나올 뿐이다. 명화보다 도균이 때로는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 명화라는 캐릭터가 행동력과 배경이 부족한 탓에, 그가 대표하는 '평범한 선의'가 등한시되었던 건 아닐까? (물론 그렇게까지 해야만 평범한 선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상황이 문제가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결국 변하는 사람, 영탁이든 민성이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과 보금자리를 빼앗아서라도 살아남으려는 사람에 대해선 쉽게 긍정하고 감정적으로 동화되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떤 도덕적 불편함을 야기하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꺼려지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는 이 불균형을 감안했다면 명화를 더 복잡한 인간으로 만들고, 본성이 변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달라지는 주변 인물들에 맞서서 유연하게 대응하는 캐릭터로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이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모든 캐릭터를 다 그렇게 만들어서 중구난방으로 갈 필요는 없지만, 명화 캐릭터는 영화 속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꽤 평면적이었다고 본다. 


#

영화가 잘 되면 장점은 각자 알아서 후기들을 엄청나게 쓰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상이한 시선들이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캐릭터에 더 호의적인가, 주제의식에 대해 얼마나 동의하는가, 지엽적인 말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영화 전체의 문제의식에 집중하는가, 영화의 표현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는가 아니면 도외시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후기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대중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마 그런 것이다... 아 언젠가 나도 그렇게 남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있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복되는 이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