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반 동안 엄마들이 이끌었던 《책 읽는 도토리》가 아이들끼리 하는 모임으로 바뀌었다. 약 5개월의 연습 기간을 갖고 아이들이 차례대로 발제와 진행을 했다. 엄마들은 곁에서 지켜보며 도왔다. 언제쯤 아이끼리 모이게 해야 할까를 정하기 어려웠다. 조금만 더 능숙하게, 조금만 더 보기 좋게 모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부모의 욕심 혹은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가 이끄는 모임도 완벽할 수 없다. 어른에게도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일은 평생의 숙제다. 또한 많은 삶의 기술들이 그러하듯이 책 모임 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은 아이가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나, 직접 모임을 해나가며 조금씩 터득하게 된다. 이제 엄마들은 아이들을 믿고, 아이들에게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책 읽는 토토리》 181회 모임 날, 아이들과 모임 이름을 새로 짓고, 모임의 규칙과 각자 할 일을 정리했다. 책 모임을 시작할 때는 일종의 의식처럼 이런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해야 성실하게 책 읽고,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함께 정한 규칙이 힘을 얻게 되고,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다. 모임 이름을 새로 짓기 전에 ‘내가 책 모임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4년 반 동안 쉬지 않고 모임 한 아이도 있고, 모임을 그만두었다가 얼마 전에 다시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2년 남짓 활동한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은 왜 책 모임을 계속하려고 하는 걸까? 궁금했다. 엄마들 없이도 모임을 잘하려면 아이들이 이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너는 책 모임이 왜 좋아?
아이들은 “정해진 책을 읽으니 골고루 읽어서 좋아요.”, “내 생각을 말하고, 친구들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요.”,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없는 친구들이 있어서 좋아요.”라고 했다. 우리 아이는 “어릴 때는 책 모임이 좋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했어요. 지금은 책 모임이 좋다는 생각을 해요. 좋은 친구도 사귀고, 책으로 이야기 나눈다는 게 좋아요. 얘기를 하다 보면 친구 감정을 알 수 있어요. 책 모임이 내 일상이 됐어요.”라고 했다. 아이들은 책 모임이 좋은 까닭으로 좋은 친구, 읽을 책, 함께 나누는 이야기를 꼽았다.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 표정이 밝았고,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끼리도 잘할 수 있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모임 이름 새로 정하기_ 작은 도서관
“이제 진짜 너희들끼리 모임 할 거야. 모임 이름도 새로 정해보자.”
아이들은 자기가 생각해온 이름을 꺼내 놓았다. 책 읽는 참나무, 책 읽는 큰 도토리, 온새미로, 책다모(책을 다 함께 읽는 모임),….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자기가 정한 이름이 멋지다 내세웠다. 1차 투표를 통해 뽑힌 이름은 ‘온새미로’와 ‘작은 도서관’이었다. 2차 투표에서 모든 아이들이 ‘작은 도서관’을 골랐다. 아이들은 ‘우리 책 모임은 여러 가지 책과 즐거운 활동 그리고 좋은 친구가 있는 공간’이니까 ‘작은 도서관’이 어울린다고 했다. 자기가 골라온 이름이 뽑힌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러워했고, 나머지 아이들도 밝은 표정으로 모임 이름을 공책에 적었다. ‘온새미로’를 골라갔던 우리 아이는 “엄마, 차마 내 것을 고를 수가 없어서...”하며 씩 웃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아이 손을 꼭 잡아줬다.
책 모임 규칙 정하기
아이들끼리 모임 하면 갈등이 생겨도 중재해줄 사람이 없다. 아이들끼리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면 합의된 규칙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행동이 모임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알고, 각자가 정해진 약속을 지키려 애쓸 때 모임이 잘 된다. 책 모임을 4년 반 해온 아이들이라 모임에 방해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안다. 어떻게 해야 모임이 잘 되는지도 안다. 각자 3~5가지 규칙을 적고, 함께 모아 두고 비슷한 것끼리 묶었다.
각자 3~5개씩 규칙 제안하기
1. 모임 시간 지키기
2. 진행자 존중하기
3. 주제에 맞는 말과 행동하기
4. 친구 발표 잘 듣고 호응해주기
5. 좋은 생각 좋은 얘기 많이 하기
이렇게 크게 5가지로 정리했다. 아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경청이다. 아이들은 공책에 함께 정한 규칙을 적었다. 한 아이가 “규칙을 정했으니 잘 지켜야겠다.”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휴, 규칙이 생겨 부담이 된다.”는 아이도 있었다. 공적인 틀이 주어지니 아이들이 긴장도 하고, 기대도 하는 모습이었다.
정한 규칙을 소리 내어 한번 읽어본 뒤, 책 모임 할 때 각자 해야 하는 일을 살폈다. 아이들은 엄마가 책 모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어떤 태도로, 어떤 말로 진행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진행자와 토론자의 역할을 명확히 정리해본 적은 없다. 아이들끼리의 모임을 앞두고, 책 모임 진행에 필요한 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역할 정하기
1. 발제자가 할 일
- 발제문(질문 8~10개) 만들어서 모임 전날까지 밴드에 올리기
- 책임감 갖고 진행하기, 모임 후 뒷정리 신경 쓰기
- 모임 후 밴드에 모임 일기(모임 소감) 써 올리기
- 독서감상문 쓰기(공책)
2. 다른 친구들이 할 일
- 책 열심히 읽고, 발제문 보고 미리 생각해오기
- 사진 촬영하기 (모임 중/ 모임 후)
- 모임 후 발제자가 올린 모임 일기에 덧글 달기(모임 소감/한 줄 이상)
- 독서감상문 쓰기(공책)
이렇게 《작은 도서관》 모임 준비를 끝내고, 진행 순서를 정했다. 누가 먼저 해도 상관없었다. 아이들은 발제도, 진행도, 토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아이는 발제자가 되어 모임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게 두렵다면서도 엄마 눈치 안 보고 재미있게 할 거라며 웃었다. ‘엄마 눈치 안 보고’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너무 잘 알기에 나도 웃음이 났다. 아이들이 가져온 책을 살펴보며 읽을 책 목록도 완성했다. <산왕 부루 1,2>, <어두운 숲 속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 <나는 뻐꾸기다>, <몽실언니>, <샬롯의 거미줄>. 아이들마다 좋아하는 영역이 달라서 골라온 책도 각양각색이었다. 책상 위에 늘어놓고 보니 든든했다.
아이들이 고른 책
우리 아이는 “우리만의 모임이 생겼다.”며 잔뜩 신이 났고, “엄마, 나 다른 책 모임도 또 만들고 싶어요.”했다. 모여서 책 읽는 게 좋다고, 많이 하고 싶다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엄마, 산왕 부루 책 얼른 빌려주세요. 모임 잘하려면 두 번 읽어야 해요.”하며 재촉했다. 도서관 앱을 열어 책을 검색하고, 부랴부랴 상호대차 신청을 했다. 아이는 더는 책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을 수 없게 된 엄마의 헛헛한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저 엄마 없는 공간에서 친구들과 벌일 일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는 모양이다. 저만치 앞서 뛰어가는 아이 뒷모습을 보며 좋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아이는 자라고, 엄마는 한 걸음씩 아이에게서 멀어진다. 그게 당연한 줄 알면서도 가슴 한쪽이 시렸다.
책과 친구가 있는 삶
이렇게 새로 시작한 《작은 도서관》은 얼마 전에 35회 모임을 했다. 그사이 모임을 그만둔 아이들이 생겨 여자 아이들 셋이 하는데, 발제도 진행도 척척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토요일 저녁에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눈다. 코로나 상황이 되어 화상 모임을 진행하는데,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이번에는 쉬면 안 되나요?”라는 애교 섞인 투정도 한 번 없다. 오히려 어쩌다 모임이 없는 날이면 “엄마, 심심한데. 엄마랑 책 모임 하면 안 되나요?” 한다. 함께 모임 하는 친구들은 우리 아이의 소중한 벗이며, 책 읽기 동료다. 책 모임을 새로 꾸리고, 모임 이름을 다시 바꾸더라도 이 친구들은 오래 함께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우리 아이를 올곧게 키운다.
“책 모임은 언제까지 하게 될까?”하고 물으니 아이가 답한다. “어른 돼서도 할 거예요. 스무 살에 친구들이랑 여행 갈 건데, 여행 가서 책 모임 할 거예요.”라고. 아이가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이는 책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자란다. 책 모임이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