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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Feb 25. 2021

31. 아이의 상처를 보듬는 책 모임_<<스페이스>>

- 아이 책 모임 이야기

초등 5학년 책 모임 《스페이스》의 시작


  큰 아이는 4학년 2학기에 친구 문제로 힘든 일을 겪었다. 학급 친구 여럿에게 무시받고, 놀림당한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여러 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내 아이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수도 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답하느라 심신이 지쳐갔다.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아이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이 얼굴은 나날이 어두워졌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그런 아이를 다독이겠다며 나는 함부로 아이 상처를 들추었다. 빨리 괜찮아지라고 다그쳤다. “예방주사 맞은 거다”, “다들 겪는 일이다.” 나는 어른이랍시고 아무 소용없는 조언을 했다. 그런 말들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짜증과 화를 던지고 받았다. 서로의 마음에 깊게 생채기를 냈다. 결국 아이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다급해졌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치료받아야 한다. 아이를 보듬어줄 안전하고, 따뜻한 공동체가 절실했다. 또래 친구가 있고, 소통과 공감이 이뤄지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아는 건 책모임 밖에 없었다. 마침 1년 동안(3학년 겨울~4학년 겨울) 해오던 책 모임 《책사냥꾼》을 정리한 뒤였다. 《책사냥꾼》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에서 모여 책 대화를 나눴다. 나 혼자 진행했는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모임 인원이 너무 많고, 책 읽어오지 않는 아이도 있어 책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책 모임 경험이 적은 내가 능숙하게 이끌지 못한 탓도 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모임을 정리했다.


  《책사냥꾼》은 1년밖에 하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는 책 모임에서 꾸준히 친구들 만나는 걸 좋아했다. 수줍어하면서도 제 이야기를 했고, 다른 아이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웃었더랬다. 지금이야 말로 아이에게 좋은 책과 친구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에 다시 용기를 냈다. 책 모임을 새로 시작하기로 한 거다. 이번에는 여자 친구들끼리의 모임이어야 했다. 아이에겐 속마음을 털어놓고, 서로 공감해줄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책사냥꾼》을 함께 했던 친구, 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 엄마가 나와 책 모임을 같이 했던 친구. ‘사춘기’라는 말로만 설명되는 미묘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 이제 막 12살이 되려는 소녀 넷이 책 모임을 시작했다. 자기 몸과 마음에 관심이 많고, 어른의 눈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 책 모임은 그 아이들만의 비밀 공간이 되어야 했다. 시작은 어른이 함께하지만 최대한 빨리 어른이 사라져 줘야 한다. 모임의 주체를 아이들로 세우자. 그런 마음으로 모임을 준비했다.

     

엄마 모임 먼저 하기

     

 아이 책모임이 탄탄하게 운영되려면 엄마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한다. 엄마가 아이 책모임의 가치를 알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책 모임이 잘 되기 때문이다. 어른 없이 아이들끼리 모임 할 때는 더 그렇다. 그래서 큰 아이의 두 번째 책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엄마 모임을 가졌다. 가족들 다 챙기고 늦은 밤 8시에 집 앞 카페에 모였다. 사실 나는 우리 아이의 아픔을 다른 엄마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 자신도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로 섣불리 그 일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우리 아이도 친구들이 그 일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나도 아이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웃고 떠들 공간이 필요했다.


  엄마들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책 모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5학년이 되면서 아이들은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비밀이 많아졌다. 엄마들은 아이가 큰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제 부모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데 공감했다. 우리 아이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친구와 안전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엄마들은 온화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나눠줬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로 인해 생겨난 내 불안한 마음도 스르륵 사라졌다. 책 모임이 우리 아이에게 좋은 책과 친구를 선물해 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분명 아이는 제 힘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친구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로 시작하는 책 모임을 제대로 꾸려보겠다는 의욕이 솟아났다.


책 모임 운영 방법 정하기


  엄마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이 책모임 운영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내가 아이들을 돕는 기간은 최대한 짧게 잡았다. 아이들끼리 읽고 싶은 책 읽고, 하고 싶은 이야기 실컷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 매주 1회, 금요일 모임 하기

· 2016년 12월~2017년 2월은 엄마와 함께 모임 하기(질문하기, 진행하기 연습)

· 2017년 3월부터 아이들끼리 차례를 정해 책 선정, 발제, 진행하기

· 각자 공책을 마련해 매번 모임이 끝나면 책모임 소감 기록하기

· 매월 1회 엄마 모임 하기 - 아이 책모임 상황 공유 및 의견 교환


  엄마 모임에서 정한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동의를 구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모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기 때문에 무엇이든 좋다 했다. 이후 2년 동안, 아이들끼리 모임 했는데 처음 결정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지켰다. 고학년이라서 월 2회 모임 하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처음 책모임을 할 때는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자주, 꾸준히 모이는 게 좋다. 매주 1번씩 꼬박꼬박 모이니 아이들은 더욱 친밀해졌고, 책 읽는 일을 쉽게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들이 나이와 성별이 같고, 서로 이미 아는 사이라서 안정된 분위기에서 책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다니는 학원이 늘면, 자칫 책 모임이 학원에 밀릴 수 있다. 영어, 수학, 독서논술, 피아노, 미술,……. 책 모임이 학원 목록 중 하나로 전락하는 일이 생긴다. 아이가 바빠지면 제일 먼저 책 모임을 그만두고 싶어 진다. 당장 공부에 영향이 없으니 쉽게 ‘끊을’ 수 있다. ‘책모임이 우리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감사하게도 이 아이들과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모임 한다. 중학교 입학 후 학교 공부와 과제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책 모임은 그만두지 않았다. 상황에 맞게 모임 횟수나 읽는 책을 조정하면서 계속 만난다. 덕분에 우리 아이는 웃음을 되찾았고, 그 누구보다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자랐다. 책과 벗들 덕분이다.  


  2016년 12월 16일, 스페이스 첫 모임 하던 날


  엄마 모임이 끝나고 첫 번째 아이 책 모임을 했다.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아이가 내민 손을 흔쾌히 잡아준 친구들. 내겐 아이 한 명 한 명이 곱고 귀했다. 책 모임이 잘 되도록 뭐든지 하겠다고 다짐했다. 당분간은 내가 참여해서 이야기 주고받는 방법을 익히게 돕기로 했다. 처음 모인 자리에서 책모임 이름과 규칙을 정했다. 아이들은 스페이스(SPACE)를 골랐다. 읽을 책도, 할 이야기도 우주처럼 무한대라는 뜻이다. 어른인 나는 순 우리말로 좀 더 그럴듯한 이름을 정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들의 모임이니 어른의 생각은 꿀꺽 삼키고 내뱉지 말아야 한다. 이날 정한 《스페이스》라는 모임 이름처럼 아이들의 책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아이들은 2년 동안 무탈하게 책 여행을 즐겼다.


 이름 정한 후 간단히 규칙도 정했다. 아이들이 정한 규칙은 모두 네 가지이다. 다른 친구 험담 하지 않기, 책모임에서 한 이야기는 서로 비밀 보장해주기, 되도록 책은 읽고 모이되 책을 못 읽어도 모임에는 나오기, 서로의 이야기를 비난하지 말고 잘 들어주기이다. 한참 예민한 여자 아이들이다 보니 비밀 보장과 서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가장 중요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를 원했다. 아이들은 서로 매우 친밀하게 지내되 지킬 것은 지키자고 약속했다.


아이가 다시 웃다


  첫 모임 사진 속 아이들 모습에서 긴장과 설렘이 느껴진다. 주방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따뜻하게 서로를 응시하며 웃는다. 필통, 공책, 이야기 카드 따위를 잔뜩 늘어놓은 식탁을 오후 햇살이 살포시 덮는다. 이제 막 무슨 이야기인가를 시작한 아이, 그 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경청하는 아이들. 그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 나눴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고 돌아다니는 건 별로 안 좋아해.”

“응? 나는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는데.”

“나는 역사책 좋아해.”

“아, 그래? 난 역사 모르는데.”


  아이들은 준비한 면 파우치에 책 모임을 상징하는 글자와 그림을 그려 넣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같은 성별에 또래 친구이니 어떤 얘기를 해도 서로 통했다. 나는 그저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이라는 놀이판만 내어주면 되었다. 그 놀이판 위에서 우리 아이가 신나게 뛰어놀 준비를 했다. 아이는 다시 밝게 웃었다. 교실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차가운 시선과 거친 말들 대신에 친구들의 따스한 눈빛과 공감하는 말을 가슴에 담았다. 아이가 웃는 게 좋아서 나는 눈물이 났다. 아이의 마음을 살펴줄 책 한 권과 이 좋은 친구들만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눈가의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웃음이 났다.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와 오랜만에 책장 앞에 섰다. 모임에서 함께 읽을 책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 <나니야 연대기> 어때요?” 아이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높고 가벼웠다.


책 모임 <스페이스>의 시작 - 면 파우치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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