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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인 Sep 17. 2020

좋들 안한 것들의 은밀함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2019), 배꽃나래.




“좋들 안한 걸 뭐하러 찍어!”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안치연 할머니의 지청구로 시작된다. 안치연에게 본인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망신’이고 ‘좋들 안한’ 행위이다. 배꽃나래 감독은 타박에 굴하지 않고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할머니가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자 문에 난 유리로 카메라를 든 감독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인다. 예상치 못하게 얻어진 이 쇼트는 이 영화가 ‘재현’에 관한 내용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한글을 배우기 위한 안치연의 노력과, 감독이 홍콩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안치연이 다니는 노인 한글학교의 여성들이 들려주는 점상문신 이야기다.



안치연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피사체가 되기에는 ‘망신’스럽고 ‘좋들 안한’ 존재라고 되풀이해 말한다. 인식의 기저에는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깔려 있다. 안치연의 눈은 흰 종이 위 검정 글자를 따라 달리지만, 그의 시점 쇼트 안에서 글자는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는 약호나 표상체가 되지 못한 채 대상체에 머무르고 만다. 글자들은 초점에서 벗어났다가 만화경처럼 화려한 무늬를 만들어 보이고, 습기를 머금은 양 일그러지면서 텍스트 대신 비주얼이미지가 되어버린다.

다행스럽게도 안치연에게는 그만의 시점을 헤아려보려 노력하는 가족들이 있다. 영화는 가족 구성원의 격려와 그에 따라 변해가는 안치연의 얼굴을 그대로 담아내다가 후반 30초 가량의 사운드를 뮤트 처리한다. 뮤트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영화의 오디오이미지가 텍스트로 변환될 수 없도록 조치하는 행위이다. 관객은 오롯이 안치연의 얼굴이라는 비주얼이미지에만 집중하게 된다. 뒤이어 비주얼이미지가 소거되고, 암전 위에서 안치연의 음성에 맞추어 텍스트가 타이핑되기 시작한다. 언어를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의 경우 발음은 고사하고 문장의 단위를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선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안치연이 읽어내는 문장은 본래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한글’은 ‘하나님’이, ‘암글’은 ‘압들’이 된다. ‘쓸 글이라는’은 ‘산 들 이 나 놋’으로 읽힌다. 텍스트는 그를 추동하는 오디오이미지와 일치하지 않고, 화면은 들리는 그대로의 글자를 받아 적었다가 본래의 문장과 문법에 맞게 고쳐 적는 과정을 반복한다. 완성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조선사회에서 한글은 암글이라고 불리었다. 여자들이나 쓸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을 낮잡아 이르던 말이었다.” “반대로 한자는 수글이라 불렀는데, 이는 잘 써먹는 글이라는 뜻이었다.” 안치연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게 읽어낸 세 개의 문장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축약해놓은 명제이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에 앞서 감독은 문자라는 매개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영화는 자기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안치연에게 자기소개를 시키는 과정과, 감독이 홍콩의 외진 섬을 여행할 때 겪었던 일화를 통해서다. 광둥어를 읽거나 말할 수 없었던 감독은 사진을 보여주며 두부요리를 주문했다. 감독이 본래 시키려고 했던 찬 두부의 스틸 이미지에는 차가움을 기호화한 파란 필터가 씌워지고, 실제 나온 메뉴인 온두부는 같은 이미지에 필터만 일반 모드로 바꿔 끼워 제시된다. 똑같은 이미지에는 다시 오류를 뜻하는 빨간 필터가 덧입혀져 온두부가 잘못 나온 메뉴임을 나타낸다. 이 일련의 몽타주는 영화 문법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한편 비주얼이미지의 한계를 짚어주기도 한다. 영화는 기호화된 색채를 적극 활용한 이미지의 배열을 통해 관객이 특정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비주얼이미지만 가지고서는 문자 체계에 부여된 권력에 대항하기 힘들다. 사진을 보여주었어도 두부요리는 잘못 나오지 않았던가? 이방인은 기존에 사용하던 것들과 다른 약호들로 짜인 언어 체계에서 종종 난감한 상황을 겪게 마련이다. 감독은 오직 영화로만 구현할 수 있는 오디오비주얼이미지의 화법으로, 대다수가 공유하는 언어 체계 안에 입성할 수 없었던 안치연과 같은 이들이 겪어온 일상적인 좌절과 소외의 무게를 상상할 수 있게끔 만든다.



감독의 의문은 ‘왜 노인 한글학교에는 여학생들이 많은가?’로 옮겨간다. 문자를 갖지 못한 여성들의 기억은 어디에,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감독이 찾아낸 답은 점상문신이다. 점상문신은 먹물에 적신 실을 바늘에 꿰어 팔뚝 안쪽을 뜨는 방식으로 새기는 조그마한 흑점이다. 주로 동성 간에 우정을 다짐하는 표식으로 새겨졌으며, 1960년대까지는 시골에 사는 10대 중반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놀이처럼 행해졌다. 영화는 할머니들의 팔뚝에 남은 문신의 흔적을 보여주고 행위의 과정과 뜻에 대한 설명을 경청한다. 그러나 점상문신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은 언급되지 않는다. 문신의 소유자인 할머니들이 그 행위를 두고 ‘이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감독이 두 개의 큰 줄기 사이에 영화 매체 고유의 문법 체계를 상기시켰던 이유가 드러난다. 한글을 모르는 안치연 할머니와 점상문신을 해온 할머니들 사이에 “왜 여자들만?”이라는 문제의식이 배치되어 있다. 그로써 영화는 점상문신이 호명되지 못하고 비가시화된 이유가, 문신 행위자의 대다수를 이루었던 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사회적 주체로 살아본 적도 없었던 ‘여성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를 갖지 못한 이들은 사적 기록을 남기기 힘들고, 주류 사회에서 등한시되는 만큼 공적 역사로 기록될 확률도 낮다. 안치연은 점상문신을 뜨는 일을 두고 ‘기릉지 맨다’는 표현을 썼다고 알려주지만, 방언사전에조차 ‘기릉지’라는 단어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유교 질서를 중시했던 과거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적인 약자나 타자만이 문신을 새겨왔다. 여성들에게는 신체에 대한 억압이 특히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고, 남존여비 사상은 여성이 그 자신을 표현하고 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자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여성들은 사회적인 감시의 시선이 포착할 수 없는 옷깃 아래 팔뚝에 은밀한 암호를 새김으로써 하위문화를 형성한다. 지배적인 질서체계에 항거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기호를 가졌던 셈이다. 한편으로 점상문신은 결혼 때문에 타지로 떠나고, 쉽게 죽고, 연고를 잃고 떠돌게 되는 어딘가의 누구들과 자신을 이어주는 연결성의 감각이 되어주기도 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남성중심적인 한국사회의 질서를 체현한 피해자로서의 여성들을 보여준다. 문자를 읽고 쓸 수 없게 된 여성들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공포와 일상화된 부끄러움을 몸에 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억압당해온 여성들에게도 자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던 행위가,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었던 기호화된 언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폐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배태된 여성들의 신체가 품고 있던 하나의 저항, 아주 은밀하고 사적인 연대의 기록이었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라는 매개와 오디오이미지와 비주얼이미지의 배열이라는 영화의 매체 특정성이 부각된다. 그로써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동시대 다큐멘터리 영화의 두 가지 경향성―미시사를 통한 거시사로의 진입과 민간인 여성 구술사―을 영화의 화법으로 꿰뚫어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감독은 안치연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시킨다. 재현에 능숙하지 않은 할머니로 하여금 도상(icon)의 영역에 접근해보도록 종용하는 셈이다. 재현에 익숙하지 않은 안치연의 신체는 번번이 모사에 실패한다. 손녀인 감독과 피사체인 할머니는 그 과정을 유쾌하게 넘겨낸다. 애써 성공을 기약하는 대신 다정한 야유와 웃음을 공유함으로써 실패와 실수의 과정까지 ‘상통할 수 있는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허나 영화가 안치연이라는 대상에 과거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배제와 배척의 역사를 투영하여 재현해내는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안치연과 그 또래 여성들이 무엇이 ‘좋들 안한’지에 대해 재고하고 제언할 능력을 빼앗겼음을 증언한다. 그들이 글을 자유롭고 읽고 쓸 줄 알게 된다면, 다시 말해 주체적으로 이미지 혹은 기호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게 된다면 앞선 부끄러움과는 다른 층위의 부끄러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로부터 선별과 재현의 자율성을 빼앗는다는 것, 개인과 집단을 비가시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착취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의, 구조의 작동 원리라는 것 등등.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언어는 보다 촘촘하고 내밀하다. 영화는 그 은밀한 것들의 ‘좋들 안함’에 항거하기 위한 기록이자 재현이 된다.




총평 :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옷깃 아래 숨겨진 사적 기록을 통해 억압된 여성 신체가 대항 역사를 생성해냈음을 증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 매체는 상징계의 문자제일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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