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Arrival)>(2016), 드니 빌뇌브.
<컨택트>(이하 영문 원제인 <어라이벌 Arrival>)에서 지구인은 외계인을 방문한다. 외계인들은 18시간마다 한 번씩 UFO(이하 ‘쉘’)의 입구를 열어 그들의 방문을 허한다. 지구인과 외계인은 차단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지구인은 묻는다.
왜 이 곳에 왔나요? Why are you here?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요? Can you understand us?
어디서 왔나요? Where did you come from?
무엇을 원하죠? What do you want to?
영어로, 중국어로, 러시아어로, 일본어로, 지구인은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대답은 없다.
개봉 당시 서울극장에서 <어라이벌>을 보았을 때, 나는 영화의 서사를 쫓기에 급급했다. 저 장면은 무슨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걸까? 나는 이 영화를 잘 따라가고 있는 중인가? 루이스와 이안이 헵타포드 둘과 대화를 나누는 숱한 세션 또한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어라이벌>을 재생시킨 뒤 랩탑 화면을 마주 보고 앉았을 때, 나는 일련의 세션 씬들에서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일전에 스크린을 앞에 두고 앉았을 때는 받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작은 직사각형의 모니터 속, 거대한 직사각형의 차단 벽이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투명한 차단 벽을 사이에 둔 지구인과 외계인, 낯선 이들끼리의 조우. 마주 보며 응답을 기다리는 상황. 이 태도는 어떤 영화를 처음 볼 때의 그것과 유사하지 않나?
<어라이벌> 속 의사소통 장면은 곧 영화를 보는 이와 영화 간의 소통이나 다름없다. 이 생각을 떠올린 건 차단벽의 비율 때문이다. 차단벽은, 처음에는 그저 3:1의 거대한 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스가 그 창에 바짝 붙어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차단벽의 비율도 달라진다. 그때부터 차단벽은 2.35:1의 시네마스코프 비율과 흡사하게 보인다. 헵타포드들이 바깥세상과는 유리된 쉘 속으로 인간을 불러들인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떠밀어 내보낸다는 점 또한 영화를 연상시킨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영화관 의자에서 떠밀려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루이스의 뒤에는 프로젝터를 통해 헵타포드들에게 질문을 띄워 올리는 인간들이 있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들의 존재는 극장 객석 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영사 기사를 연상시킨다. 소리 없이 숨을 죽인 채 필름의 상을 스크린에 띄워 올리는 이들 말이다.
영화의 탄생과 관련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을 찍은 짧은 필름을 틀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피했다는 바로 그 얘기다. 이는 진위 여부를 떠나 최초로 스크린 너머 움직이는 것들을 마주한 사람들의 공포, 당황을 설명하는 예시가 되어 왔다. 외계인과 조우한 최초의 자리에서 루이스와 이안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이 인류를 대신해 해내야 할 임무가 어깨를, 공포를 짓누른다. 그러나 루이스와 이안의 신체는 분명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다시 만남의 자리로 돌아갈 때는 두 사람 다 훨씬 의연해져 있다. 경험을 통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그 공간에 들어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쉘 속으로 들어가 차단벽 너머의 낯선 것들을 마주하는 상황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대화를 이끌어내어 응답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 스크린 너머의 낯선 것들을 마주하는 것과 크게 다른 상황인가? 그들에게 상대의 응답이 절박하다는 것도 크게 이상할 건 못 된다. 루이스와 이안이 영화로부터 반드시 답을 얻어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이를테면 비평가처럼 말이다.
영화의 프로세스가 인류의 인식 밖의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영화가 좀 더 낯선 것이고, 낯설어서 두려운 것이고, 어떤 식으로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랬다면 영화를 두고 <어라이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해독하려는 이들과 그를 저어하는 이들, 영화와 불화하는 이들, 영화를 없애버리려는 이들이 한데 뒤섞여 난국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중에서는 끝내 영화의 언어를 터득하고 만 이도 생겼을 것이다. 선구자들은 영화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서 나아가 스크린에서 작동하는 영화만의 언어를 파악하고자 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영상언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언어 말이다.
헵타포드의 언어가 영상언어와 완벽하게 맞물리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문자언어보다는 영상언어의 ‘구성 방식’, 엄밀히 말해 영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가깝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헵타포드어의 물성, 문자보다는 이미지에 가까운 점, 시간의 순서에서 자유롭다는 점, 두 헵타포드가 함께 보낸 마지막 전언,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는 점 모두가 강력하게 쇼트와, 쇼트가 담긴 필름의 편집을 연상시킨다.
영상언어를 읽어내는 작업은 (타고난 직관도 영향을 끼치지만) 어느 정도 훈련을 받으면 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다. 영화 역사 초반에는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다. 오늘날엔 영화 매체의 표현법과 그 바탕에 깔린 기술적인 문제를 숙지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누구나 영상언어를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영상언어를 읽어내는 건 문자언어를 독해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문자언어는 문자, 즉 고안된 기호로 구성된다. 영상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는 문자가 아니다. 쇼트, 이미지, 기호로서의 이미지다. 문자언어는 관념적이지만 영상언어는 일종의 물상이다. 한편으로 문자언어는 필기구를 이용해 기록할 수 있다. 영상언어는 사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광학의 원리를 따른다. 빛과 그림자로 구성되어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문자언어는 지역에 따라 그 말과 문자가 달라지지만, 영상언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국경을 초월할 수도 있다. 영화의 탄생을 가능케 한 건 과학이고 기술이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접근 방식 또한 영화를 독해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그렇다고 직관이 중요하지 않은 건 또 아니다. 처음 둘이 만나던 장면에서 물리학자인 이안과 언어학자인 루이스 사이 이해의 간극은 꽤 넓어 보였지만, 루이스의 논리적인 접근방식은 이안과 웨버 대령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 한편 루이스는 헵타포드 애벗의 비언어적 메시지를 알아듣는다. “애벗이 내가 차단 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길 바라요.” 이안 박사는 묻는다. “어떻게 알죠?” 루이스는 속삭이듯 대답한다. “나도 몰라요.” 논리와 직관 두 가지를 다 사용해 외계인과의 대화에 성공한 루이스지만, 차단 벽 없이 헵타포드와 마주하는 순간은 긴장될 수밖에 없다. 루이스는 헵타포드 측에서 보내온 이동수단을 통해 쉘 안으로 들어선다. 이제는 영화가 정말 그녀를 초대하고 있다. 차단 벽이 사라진 세계에서 헵타포드가, 영화가 걸어온다.
우리는 차단 벽 너머에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헵타포드의 이동 방식은 일곱 개의 다리를 움직이는 것 하나만이 아니었고(그들은 문어가 물살을 가르는 동작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동한다.), 키도 더 크다. 머리라고 생각했던 부위는 실제로는 가슴팍 정도 되는 것 같다. 이를 루이스는 맨눈으로 마주한다. ‘낯선 그것’의 온전한 신체를 목도하고, 그것이 움직이는 방식, 우리와 그것 사이를 가로지르는 스크린 너머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내 인지를 벗어나는 존재들과 내 지각의 범위 내에서 접촉해 왔다는 사실이 주는 새삼스러운 동요.
헵타포드가 문어처럼 움직이고 거미처럼 걸어 나가는 모습을 회상하는 지금, 나는 스크린 너머에서 영화가 흐르고 지나다니는 방식 또한 저럴지도 모르겠다는 백일몽에 빠진다. 영화는 매끄러운 수면 아래 저렇게 긴 다리를 일곱 개 정도는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랴? 세상의 어느 누가 스크린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영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나. 우리는 셀룰로이드 필름에서 디지털 픽셀까지를 거쳐왔지만, 그 누가 영화의 진짜 몸체를 다 안다고 장담할 것이며, 영화로부터 직접 언질 받기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너는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우리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와 동일하게 사고할 수 있는 무기를 가졌다고.
그리고 세상은 영화가 된다.
<어라이벌>을 영상언어를 읽을 수 있는 이가 영화와 조우하여 대화하는 내용이라 상정해 보기로 하자. 영화는 그 이를 초대하여 자신의 배면을 보여주었다. 그 이에게 어떤 비밀 혹은 보물까지 일러주었다. 이 극에서 루이스가 건네받은 비밀 혹은 보물은 딸아이의 존재를 태어나기 전부터 알게 되었다는 것, 아이가 죽을 것까지도 미리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루이스는 자기 삶의 중요한 쇼트들, 사랑스럽고 가장 충격적인 쇼트들을 이미 보아버렸다. 사실 그녀는 초반부터 나레이션을 통해 앞으로 보게 될 이야기가 딸이 살던 기간 이외의 날들에 존재하는 딸의 이야기임을 못 박아두지 않았었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영화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벌어지는 어떤 사건을 쫓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어라이벌>의 비밀이 밝혀졌다. 이 영화는 루이스가 본인의 삶에서 딸이라는 특정한 테마를 가지고 편집한, 루이스 자신의 영화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초재적 관점으로 우리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삶을 미리 구상하고 일일이 쇼트로, 씬으로, 시퀀스로, 한 편의 영화로 구성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어떤 영화의 방문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루이스의 경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루이스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귀하고 특별한 쇼트가, 씬이, 시퀀스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이미 안다. 그리고 그 끝은 슬픔으로 내달리게 될 줄도 안다. 그럼에도 흐름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일어나 나가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기 영화를 받아들인다. 미리 엿본 쇼트들이 삶이라는 긴 영화 한 편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도록 내버려 둔다. 헵타포드의 언어 덕분에 루이스는 그 쇼트들이 한데 모여 씬이 되고, 씬들이 나열되어 시퀀스가 되고, 시퀀스들이 어우러져 영화 한 편이 되는 과정에 여러 차원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끝을 알기 때문에 더 후회 없는 순간순간을 살아내지 않았을까. 끝을 알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쇼트를, 씬을, 시퀀스를 연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끝을 알기 때문에 더 담담하게 자기 영화를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루이스는 시간의 연속성 안에 얽매인 인간으로서 자기 삶을 사는 동시에, 초월적인 위치에 선 연출자로서 딸을 만나 함께 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며, 끝을 아는 관객으로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떠나보낸다.
<어라이벌>은 한 사람이 낯선 대상을 만나, 낯선 언어를 깨우치는 이야기다. 동시에 <어라이벌>은 영상언어를 완벽히 깨우친 한 사람이 선택해서 만든 한 편의 영화이기도 하다.
처음 <어라이벌>을 마주했을 때 나는 영화라는 덩어리를 단순히 문학 언어로, 시간순에 따른 플롯만으로 파악하려 들었다. 다시 본 <어라이벌>은 내게 영화 보는 행위가 끊임없는 접촉이고 상호적인 방문임을 알려주었고,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저 객석에 앉아 수동적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몸은 객석에 있을지언정 끊임없이 영화에게 다가가 영화만의 언어를 읽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낯선 이가 왜 이 땅에 왔는지, 나의 적일지 친구일지 알기 위해서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어라이벌>은 영화도 우리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내게 방문한 어떤 한 영화 또한 방문자인 나를 앞에 두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신호를 파악하기에 따라서 그들은 불가해한 덩어리에서 응답하는 존재로 바뀔 수 있다. 그들은 선물 혹은 파멸을 전해주고 보물 혹은 비밀을 알려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내 삶이라는 영화를, 그 영화의 특정 시퀀스를 통째로 바꾸러 온 특별한 객일 수도 있다. 영화가 하는 말을 읽어내기에 따라서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세계는 확장될 것이다.
카메라와 대상으로 이루어진 ‘너’가 있다면, 그 지표적 기호의 ‘너’는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다. ‘나’는 ‘너’에게 다가간다. 손을 뻗는다. ‘너’를 읽는다.
왜 이 곳에 왔나요?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요?
어디서 왔나요?
무엇을 원하죠?
두 번째 질문만큼은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영화가 보는 이에게 되돌려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요?
(2017.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