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과 다양성으로 둔갑한 몰상식

배려와 존중의 부재

by 타조

아이들은 해변에 모여 앉아 있었고, 랠프는 소라를 들고 질서를 만들려 했다.
“이걸 가진 사람만 말할 수 있어.”
그는 최대한 어른처럼 말하려 했고, 몇몇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합창단을 이끌던 경험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앞에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사냥을 해야 해. 규칙 같은 건 나중 문제야.”

피기가 소라를 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 하자, 잭은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너는 그냥 닥치고 있어.”
그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따라 웃었다. 피기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잭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끼어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사냥꾼들을 데리고 갈 거야.”

그 순간, 소라가 상징하던 ‘말할 권리’는 사실상 무너졌다. 랠프가 다시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잭은 이미 규칙 자체를 가볍게 밀어내고 있었다.


<파리대왕>의 한 장면, 윌리엄 골딩




극실용주의 사회라고나 할까?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되었거나 돈을 버는 지식 외에는 굳이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세상이다. 물론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지혜를 쌓는 일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는다. 그들은 지혜가 자기 자신과 전반적인 삶의 가치를 향상시킨다는 사실을 믿는다. 지혜는 지식과 경험을 응축한 삶의 정수이다. 고독이라는 모루 위에서 사색과 사유라는 정신적 도구로 지식과 경험을 두드리고 다듬어 지혜의 틀을 구성하고, 훌륭한 이성으로 마지막 담금질을 하면 성숙하고 고결한 지혜가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에 급급하거나 그런 깨달음에 무지한 사람은 정신을 높이는 숭고한 일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선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최악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결핍으로 발생하는 몰지각이다.


현재 우리가 관통하는 개인주의는 전적으로 과도기적이다. 성장을 위해 개인보다 집단과 사회를 중시하며 어렵게 자란 우리의 경제와 문화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자란 유실수의 과실이 풍성하게 맺힌 시대가 도래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시대의 종식으로 더 이상 경제성장 때문에 개인의 삶을 반납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동반하는 상황은 찾기 힘들다. 특히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주역들은 이제 연금을 받으며 노년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힘들게 일군 사회는 다행스럽게도 고속 성장을 거듭하여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개인보다 집단과 사회, 나라를 위한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인권이 박탈당하고 기본적인 삶이 무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많은 이들이 격렬히 저항하여 과거보다 개인의 삶이 존중되는 사회로 변모했다. 그러나 집단과 사회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던 과거의 반작용으로 이제는 개인의 권리가 집단과 사회의 가치를 능가하는 폐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몰상식한 일들이 개인의 특성이나 다양성으로 둔갑하여 타인을 곤란하게 만들고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켜, 집단과 사회의 가치가 훼손된다. 다양한 개인의 특성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가치를 심각하게 저해한다면 결국 우리 사회는 응집력을 잃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무너질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가치와 사회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이자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이다.


파리대왕에는 사회 규범이 무너지자 고삐가 풀린 것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공감이나 배려보다 힘과 즉각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잭. 그는 규칙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을 동등하게 보지 않으며 행동 결과에 책임감이 결여되었고 상황이 허용하면 더 거칠어지는 무례함을 드러낸다.


지하철에서 만난 한 남자는 잭과 닮았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지하철에서 무리하게 사람들을 밀며 탑승한 남자에게 나도 갑작스럽게 밀려 불쾌했다. 열 살 이상 어려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밀면 어떻게 해요?"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나의 눈빛에서 읽히는 불쾌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독기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귀에 꽂힌 이어폰을 끄더니 말을 짧게 이었다.

"뭐?"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지만 정확하게 한 글자로 재차 반복했다.

"뭐?"

불쾌함이 증폭되었으나 최대한 격식을 갖추었다.

"심하게 밀었잖아요."

남자는 여전히 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똑같이 대응하고 싶지만 무례한 표현이 익숙하지 않아서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마주하는 눈빛에서 몰상식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한 마디 덧붙이고 고개를 돌렸다.

"진짜 격 떨어지네."

남자는 다음 역에서 사람들이 탑승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강하게 좌우로 흔들어 내 등을 밀어재꼈고 나는 몇 걸음 밀려 겨우 중심을 잡았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런 사람과 이 한순간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야 하다니. 지인들에게는 호쾌하고 친절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비열한 종자를 사회 곳곳에서 마주쳐야 하다니. 그의 가족과 친구, 아내, 자녀에게는 어떤 모습일지. 나의 소중한 가족과 선량한 사람들도 당혹스러운 일을 겪겠지. 하지만 정작 그는 다른 사람에게 경험담을 자랑처럼 늘어놓겠지.


법과 질서가 전무한 무인도라면 차라리 생존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렸을 텐데, 규범이 버젓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마주친 잭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올렸다. 분명 살면서 비슷한 사람을 또 마주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굳어진다. 그때 내 행동이 그에게 어떤 깨달음을 안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포용적인 태도로 그에게 가르침을 선물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윌리엄 골딩, 1911-1993>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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